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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Nov 17. 2021

[부캐대전] '나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삼일로창고극장 <부캐대전> 스토리 ① 무아지경 카빙버디!

사각사각,


나무 깎는 소리만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나 역시 나의 본분(!)을 잊고 나와 카빙 나이프, 나무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창작자들과 함께하는 조금 엉뚱한 워크숍 시리즈, <부캐대전>의 첫 번째 프로그램 <무아지경 카빙버디!> 현장의 모습이다. 참가자들은 만들고 싶은 숟가락을 그려서 사전에 제출했고, 그 그림대로 기초 작업이 된 나무를 깎아 숟가락으로 만드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흔한 우드 카빙 클래스다. 하지만 이곳은 극장이라는 사실. 그 사실이 자꾸 나를 웃게 한다.

 


사각사각,


“그런데 어쩌다가 나무 깎는 일을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침묵 속에서 숟가락을 깎다 말고 한 참가자가 툭 질문을 던진다. 나무에서 눈도 떼지 않고 한 질문이다. 다 같이 웃음을 터트린다. 다들 웃으면서도 손은 쉼이 없다. 공연예술가인 하소정 작가가 극장에서 공연이 아닌 우드 카빙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 이 상황이 모두에게 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일'의 의미를 생각하다.


하소정 작가가 우드 카빙을 시작하게 된 건 2018년 무렵부터다. 워낙에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고, 마침 겨울이라 농한기였고, 나무 술잔을 깎는 우드 카빙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곧바로 카빙 나이프를 구입해 집에서 숟가락을 깎기 시작했다. 왜 숟가락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숟가락이 깎고 싶었고, 그렇게 깎은 숟가락의 사진을 종종 SNS에 올리곤 했다.


어느 날 SNS에 엄마가 댓글을 남겼다.

─ 이거 깎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모른 척, 존댓말로 댓글을 달았다.

─ 글쎄요. 한 나절쯤.


그리고 엄마를 만난 날, 엄마는 '그렇게 비생산적인 일은 뭐 하러 해?'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그 말에 당황해 횡설수설하다가 열이 나서 또 숟가락을 깎으러 갔다. 다섯 시간을 꼼짝도 않고 깎다가 허리를 폈다. 눈앞에는 어느덧 수북해진 칼밥과 숟가락.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나를 벌어 먹이지도 못하는 이 무용한 일은 정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일이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일'일까? 나를 벌어먹이지 못하는 일은 '일'이 아닌 걸까? 나에게도 중요한 질문이기에 그가 이 질문들을 어떻게 풀어 나갔을지 궁금해졌다.




우드 카버와 퍼포머 사이,

지극히 나다운 일의 발견



그날의 질문으로부터 작가의 작업이 시작됐다. 사람들의 앞에서 나무를 깎는 퍼포먼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다르다 느꼈던 정체성의 경계가 무너지고 섞이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네가 나무 깎는 걸 왜 봐야 해?"라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지만, 하소정 작가는 꿋꿋하게 자기만의 작업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의 실험을 시작으로 광화문, 과천, 문래동, 포항 등 다양한 곳에서 우드 카빙을 했다.


혼자 나무를 깎으며 쌓아온 '일'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그는 사람들과 '일'에 대한 대화를 하기도 하고, 함께 숟가락을 깎기도 하고, 숟가락을 팔라는 행인과 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며 작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 카빙은 혼자서 하는 카빙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순간의 하소정은 100% 우드 카버도, 100% 퍼포머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다. 경계가 무너지고 섞이면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이상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그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까 말이야,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극장에서 이런 이상한 카빙 워크숍을 할 수 있을까? 이건 하소정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고, '하소정다운' 일이다.


하소정, <1/4평의 시간>




나를 닮은 숟가락,

나만의 무언가를 만드는 경험.



워크숍을 열기 전부터 어떤 사람들이 올지,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돌아갈지 너무 궁금했다. 최근 전시를 마치고 극도의 창작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싶어서 오신 분, 이상하고 재미있는 거 한다는 소문에 찾아왔다는 분, 손재주는 없지만 도전해보고 싶다는 분, 삼일로창고극장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나무를 너무 좋아해서 '우드 카빙'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왔다는 분, 하소정 작가님을 좋아해서 문화생활도 할 겸 나왔다는 분, 회사와 대학원을 병행 중이라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싶어서 오신 분까지 ─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모였다.



워크숍 소개글엔 '두런두런'이라 쓰여 있었지만, 사실 우리는 자기만의 나무를 깎느라 대화할 새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간헐적으로 '아앗!' 하는 소리가 나면 '손을 다쳤구나, 저런...' 생각할 뿐이었고 작가님이 '이리 오세요. 괜찮아요.'라며 속삭이는 소리를 ASMR처럼 들으며 카빙에 몰두했다. 정신 차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순식간에 워크숍의 끝자락. 각자의 소감을 나누고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저, 본분을 잊은 것 같아요. 너무 재밌었어요..."


내가 먼저 고백했다. 정체성을 탐색하는 워크숍을 함께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나무만 깎다니. 이렇게 침묵만 흐르게 하다니. 각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도 던져볼걸 그랬나? 죄책감이 일었다. 하지만 곧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걱정이 사그라들었다. 다들 각자 자기만의 나무를 깎으며 자기만의 생각과 만난 것 같아서였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저는 사실 사과도 잘 못 깎아서 걱정했는데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요즘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자극적인 콘텐츠만 보는데, 이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빵으로 치면 치아바타 같은 시간이었달까요. 서로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같이 깎으면서 왠지 친해진 느낌이에요."


"그동안 내면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나만의 공간에 있어도 계속해서 외부의 자극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외부에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좋았어요. '힐링'이라는 단어를 넘어 정말 새로운 경험을 했어요. 감사해요. <부캐대전>이라 했는데 저는 진짜 제 부캐를 찾은 느낌이고요. (웃음) 계속 이 작업을 할 것 같아요."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까 작가님이 '숟가락이 본인을 닮는다'는 말을 해주셨는데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나무를 깎다 보니 자꾸 욕심부리고 성급해지는 나를 발견했거든요. 잘 마무리 지어보고 싶어요."


"저는 정말로 힘이 많이 들었어요. 힘이 부족하더라구요. 처음엔 내가 만드는 거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깎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깎다 보니까 나무가 원하는 방향과 각도가 있더라고요. 점점 나무가 원하는 대로 깎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무는 처음 깎아보는데요. 일이나 과제를 할 때 늘 잘해야 한다, 망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거든요. 근데 나무를 깎는 일에는 ‘망한다’는 게 없더라고요. 잘못 깎으면 오히려 다른 모양을 만들어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모양이 된 것 같아요. 비대칭이지만 마음에 들어요.”


하소정 작가는 마지막으로 사실은 숟가락보다 중요한 건 ‘칼밥’ 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건넸다. 칼밥이 오롯이 우리의 시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 말에 새삼 발아래 쌓인 칼밥을 보게 됐다. 멋진 숟가락을 만들고 싶어 여념이 없었는데 이렇게 많은 칼밥을 만들어냈었구나.



어쩌면 우리가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나무를 깎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대로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대로 살아지는 것, 잘못 깎은 줄 알았지만 그런대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모양을 갖게 되는 것, 숟가락을 깎는 과정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칼밥을 쌓는 것.


각자의 칼밥과 도구를 챙겨 자리를 떠나는 카빙버디들을 보며 각자의 자리에서 무아지경으로 숟가락을 깎는 장면을 겹쳐본다. 친구들,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요. 각자의 모양대로, 자기다움을 깎아 나가는 과정을 응원할게요.



삼일로창고극장 ‘창고개방’ 프로그램 중 ‘부캐대전’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www.samilro.com


스토리 디렉터 / 김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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