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나는 백수가 되었다. 퇴직금이 버텨줄 때까지 내 삶을 두고 실험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잠정적으로 정해둔 기한은 6개월 정도였다. 간절하게 변화를 원했고, 그건 누군가가 나에게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내 삶에 창조적 충돌을 만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 때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현장에는 무조건 가 보고, 평소 궁금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대가없이 해 보면서 바쁘게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아래는 그 시절에 남긴 기록들이다.
개인이 주체가 되어 조직 밖에서 가볍게 실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와 조직을 벗어난 개인 간 느슨한 연대, 개인의 표현을 돕는 작은 무대들,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동네 커뮤니티를 실컷 경험했다.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와 플랫폼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었고, 나는 그 변화의 흐름을 예술의 맥락으로 읽고자 했다. 당시 예술경영 논문을 써야 했기에, 연구자적 관점으로 그 흐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 잘한 것이 있다면, 멀리에서 그 파도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몸을 던져 서핑을 시작한 일이다. (실제 서핑은 못하지만.) 엎치락 뒤치락 물에 빠지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면서 내 삶을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예술과 예술가, 예술경영의 개념을 재정의하게 되었다. 예술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어 나가는 전문예술인이 아닌, 전에 없던 개념과 삶의 방식을 만들고 주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누구일까?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예술가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예술의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관찰하고 이에 ‘질문’을 던지고 ‘변화’를 야기하는 사람, 자신만의 일관된 방향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예술계 밖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직업적으로 예술가가 아니라도 '예술가'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쌓여갔다.
예술이 특정한 장르, 완성된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난다면 예술적 삶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연대와 교류행위 또한 예술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문화예술 활동은 사회적 신뢰와 네트워킹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사회자본의 축적과 확산에 기여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연대를 고양시킨다. 다행히 이런 과정에서 생각의 동료들을 만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압축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사회적 환경 속에서 물질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여기는 물질주의적 사회, 문화 취향부터 라이프스타일까지 획일화된 ‘정답사회’로 발전해 왔다. 물질주의 사회에서 탈물질주의 사회로 전환되는 시점, 사회전반적으로는 지역과 업, 조직과 삶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재정의하는 창조적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개인의 삶과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채로워지고, 일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조직이나 하나의 역할에 고정되지 않고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무경계’의 시대가 왔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 수 있다는 다양한 사례와 예술적 상상력이다. 그렇게 생각이 쌓이고 쌓이니 '내가 여기에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새로운 예술하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전정환, 『밀레니얼의 반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