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로창고극장 <부캐대전Ⅱ> 스토리 ② 비건 세상 탐험하기
"비건이 되면 끊임없이 '뒤'를 보게 돼요. 이게 어디서 왔지? 뭐가 들어왔지? 계속 뒤를 보고 확인하게 되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찾아보게 되고요."
사전 미팅에서 한윤미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비건이란 무엇인지, 비건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몰랐다. 작가는 3일간의 워크숍을 제안했다. 3일 동안 동료가 되어, 비건의 시선으로 나의 일상 그리고 삼일로창고극장이 있는 지역을 바라보고 직접 경험하자는 것. '비건이 당연한 세상'에 살짝 끼어든 후기를 남겨본다.
삼일로창고극장 스튜디오 한 켠에 '비건'과 관련한 책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워크숍 리더인 한윤미 작가와 서브 리더인 이리 배우가 작업을 하면서 보아온 책들이라 했다. 책을 자주 읽는 편이라 자부했는데, 이 중에 한 권도 읽어본 책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장 가벼운 책을 한 권 골라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몰랐던, 어쩌면 외면해왔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건이라 하면 흔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 채식을 하는 것, 즉 음식에 대한 '취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비거니즘'은 먹는 것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면에서 동물을 해치지 않는 것을 지향하는 '태도'이자 '신념'이라는 것을 이 날 처음 알게 되었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비건 지향을 실천할 것.'
3일간의 워크숍은 이 약속으로 시작되었다. '비건'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시간, 우리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꺼내 '뒷면'을 보는 작업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워크숍 참여자들은 대부분 비건을 하고 있거나 지향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인지 재활용 텀블러와 실리콘 도시락, 비건 간식 등의 물건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이런 물건도 있구나. 이런 브랜드도 있구나. 비건을 잘 몰랐던 나에겐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정보를 공유해 주기도 했다. 쓰레기를 버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불리스고'라는 어플을 소개 받았고, 현재 베스킨라빈스 스푼 어택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이제껏 전혀 몰랐던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고민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 어떤 언어는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나는 비건이 당연한 세상에 뛰어난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낯설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각이 일상을 살아가는 비건인의 감각과 가깝지 않을까. 내겐 당연한 것이 이 세상에선 당연하지 않은 것을 경험할 때의 감각. 세상에선 당연한 것이 내겐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의 감각.
비건의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크게 고민해본 적 없었던 모든 것 앞에서 턱, 턱, 멈춰서게 된다. 이것, 괜찮은가? 이거, 어떻게 만들어진거지?
비건이 아닌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도, 직접 해결해야 하는 것도, '커스텀'해야 하는 것도 많다. 나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한우 먹자!'라고 말하는 상대방에게 다른 대안을 제안해야 한다. 김밥집에서 이것, 저것, 빼고 싸주실 수 있나요? 하고 부탁해야 한다. 비건 메뉴가 거의 없는 지역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도시락을 싸서 나가야 한다. 불편하다.
나는 나의 '일상'을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는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되는 워크숍이었다. 나의 편안하고 익숙한 한 순간을 위해 그 너머에 숨겨진 것들을 외면하는 삶. 괜찮은가? 그런 삶을 통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이 몰려와 어지러웠다.
비건을 지향하는 과정, 비건을 실천하는 과정은 힘들다. 힘든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비건 세상을 탐험하는 3일 동안에도 그런 순간들은 종종 찾아왔다. 하지만 분명한 건, 비건 라이프가 반드시 '제한된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비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뾰족하게 일상을 관찰하는 경험은, 꽤 재미있기도 했다. 테마를 가지고 떠나는 여행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처럼, 비건적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다르게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그날 집으로 오는 길 비건 레시피북을 빌렸고, 비건 맛집 계정을 팔로우했다. 고기나 유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을 때 한 발짝 멈추어서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비건 세상으로 완전히 건너갈 수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 감각만큼은 유지하며 살아가고 싶다.
스토리 디렉터의 덧붙이는 말
이번 <부캐대전>에서는 '삼일로창고극장의 부캐를 찾아보자'는 의도도 있었는데, 바로 이 워크숍에서 그런 경험이 가능했다. 단순히 스튜디오 공간뿐 아니라 삼일로창고극장이 위치한 명동, 더 멀리는 을지로와 종로까지 누비며 공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평소 삼일로창고극장을 방문할 때에는 지역과 극장을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했는데(공연에 늦지 않기 바쁘다.), 해당 워크숍은 '지역 안에서의 극장'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지역과 보다 적극적으로 연결되는 극장, 지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극장을 상상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