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리 Dec 26. 2022

시시콜콜하게, 자유롭게!
진(Zine)을 만드는 기쁨

어쩌다 진 메이커(Zine Maker)의 일상

요즘 독립적인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푹 빠져 있다. 프린터기로 소량의 종이를 출력하고 반으로 접은 뒤, 송곳으로 콕콕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면 한 권의 책이 뚝딱 완성된다. 종이를 접기만 해도 만들 수 있다. 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간단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오려 붙여 콜라주를 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잘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진(Zine)이 뭔데?


이처럼 인쇄부터 제본까지 스스로 하는, 책등이 없는 얇은 책자를 ‘진(Zine)’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취향이 비슷해 부쩍 가까워진 영진과 주희가 이 개념을 알려 주었다. 어느 날 그들은 해외 아트북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싶어 알아보던 중 ‘진 메이커(Zine Maker)’라는 단어를 발견했다며, ‘진(Zine)’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 바로 해보는 건 어때요?
진을 만드는 워크숍을 열고 다같이 만드는 거예요.
혼자 하려고 하면 잘 안 되잖아요.”


내가 가장 잘 하는 게 바로 하고 싶은 것을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내친 김에 책 만들기 워크숍 시리즈를 기획했다. 마침 내가 운영하고 있는 공간, 동양가배관이 있는 배다리가 헌 책과 문구를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동네이니 이곳에서 하면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그런대로 우리끼리라도 해 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열었는데 웬걸, 10명이 꽉 차게 모였다. 신이 나서 업소에서나 쓸 법한 커다란 인쇄기도 사서 들여 놓았다.


영진과 주희가 모아온 다양한 진(Zine)들!


본격적인 시작. 첫 수업에서 영진과 주희는 진(Zine)을 만드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알고 보니 다른 나라에서는 꽤 활발하게 ‘진(Zine)’을 만들고 교류하고 있었다. 진(Zine)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이 있을 정도였다. 아들의 타투를 본 엄마의 반응, 최근 먹은 푸딩 모음 등 자기만의 시시콜콜한 주제로 만들어진 다양한 진을 보며 고정관념이 깨지는 걸 느꼈다. 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주제도, 형태도, 모양도, 모두 자유!'를 지향하는 진(Zine)의 정신에 나는 그만 반하고야 말았다. 그렇다. 책이라는 건 그저 종이를 쓱쓱 접어 만들 수도 있고, 손으로 휘리릭 써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말마다 모여 종이를 자르고 붙이며 저마다의 진을 만들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시시콜콜할수록 매력적인

진(Zine)의 세계


기가 막히게 운도 맞아 떨어졌다. 마침 우리가 첫번째 진을 완성해갈 즈음, 인천 송도의 유타대학교에서 열리는 ‘ZINE FEST’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FEST를 주최하는 사람은 유타대학교의 외국인 교수님인 ‘Scott’이었다. 진 메이커(Zine Maker)인 그는 한국에 와서 진 페스트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서 스스로 열게 되었다고 했다. (Thank you, Scott!) 우리도 각자의 첫번째 진(Zine)들을 들고 나와 연합 부스를 차렸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진(Zine)을 볼 수 있었는데, 꼬마 아이가 손으로 그려서 만든 진도 있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가볍게 만들어낸 진들이 많았다. 그걸 보며 '내가 너무 잘 만들려고 애썼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책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무거워진다. 그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벼워지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다 버리고 딱 하나만 남기려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만들다가 삐끗하면 '망쳤다'는 생각에 '버리고 다시 해도 되나요?'라고 묻게 되고, '책이라면 의미 있는 메시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하며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진(Zine)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림이 너무 크게 그려지면 화이트로 (대충) 칠하고, 글씨를 틀리면 찌익 긋고 그 위에 다시 쓰면 된다. 진의 세계에서는, 너무 잘 만들면 쿨(Cool)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 시시콜콜하게, 더 거칠게 만들어 보자! 


꼬마 진 메이커에게 사인 받음



진(Zine)이 나에게 준,

순수한 창작의 기쁨


진을 만들기 전까지, 콘텐츠라는 것은 만들면 반드시 세상에 꺼내 놓아야 한다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진을 만들면서는 조금 더 순수한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다.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도 나는 이렇게 종이를 접어 책을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왜 그 감각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걸까?


그때부터 삶 속에서 남겨두고 싶은 작은 이야기들을 진(Zine)의 형태로 마음껏 표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의 결혼식날, 결혼식장에도 진(Zine)을 만들어 놓아두기까지 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사연, 우리 두 사람의 캐릭터, 그리고 오늘 이 결혼식 입장곡에 대한 사연까지 총 3종류의 진(Zine)을 하루만에 만들었다. 뒷표지에는 'Wedding Limited Zine'이라는 글자를 찢어서 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100부쯤 만들어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 일일이 프린트하고 손으로 꿰매서 만드는 관계로 결국엔 '가져가지 말고 자리에서 읽어 주세요'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진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꿈이 생겼다. 수백 권의 홈 메이드 진(Home Made Zine)이 있는 할머니로 나이 들고 싶다. 좋아하는 순간들을 시시콜콜하게 기록하고, 사람들이 집에 놀러오면 진이 들어 있는 박스를 꺼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영진과 주희가 보여준 영상에서 한 진 메이커는 ‘누구나 자신의 진(Zine)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동의한다. 팔기 위한 콘텐츠가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 내가 느낀 이 순수한 기쁨을 많은 사람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진(Zine)을 좋아하는 이 마음은 또 어디로 이어질까?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의 의미를 재해석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