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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Dec 27. 2022

동인천 배다리에
공간을 만든 이유

그냥 좋아서 하는 선택도 있으니까

여행지에서인가 들춰본 책에서 "멋진 일은 언제나 간단히 일어나니까."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서 적어 둔 적이 있다. 정말로 그렇다. 멋진 일은 언제나 간단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곤 한다. 1호선 끝자락, 동인천의 배다리에 공간을 열게 된 것 역시 우연이었다.



배다리라는

동네의 발견


언젠가 동양가배관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 시작은 인천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브랜드를 만들 때부터 인천의 지역성을 생각하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대표이자 로스터가 인천 출신인데다 그곳에서 처음 커피를 시작했고 여전히 인천에서 로스팅을 하고 있다는 점,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도 인천을 통했다는 점을 고려했다.


아무튼, 그래서 인천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상상을 거듭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제까지 공간을 어떻게 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야말로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이었다. 인천의 풍경들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실시간으로 업로드를 했다. 이 풍경을 본 친구 비치에게 DM이 왔다. 


"해리야, 내가 전에 말했던 곳이 바로 근처야!"


전에 말했던 곳? 그러고 보니 비치가 오래 전 '인천에 아는 분이 계신데, 좋은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갤러리나 사진 작업실을 해보고 싶다. 그렇지만 인천에 연고도 없고 너무 멀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거기가 여기라고? 주소를 입력해 보니 정말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길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동네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오래된 문방구와 헌 책을 파는 서점들이 모여 있었고, 낮은 건물들이 조용하게 늘어서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비치가 말한 공간은 바로 '이십세기약방'이었다. 1950년대에 지어진 아버님의 오래된 약방을 아드님이 그대로 살려 그곳에서 한의원을 하고 계셨다. 약방 1층에는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작은 전시가 꾸려져 있었고, 외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십세기약방은 이종현 선생과 형님이신 이종관 선생께서 함께 지으신 간판명이다. 1950년 5월 인천 동구 배다리에 처음으로 문을 연 약방으로 6.25 사변과 1.4 후퇴를 겪은 역사의 산실이며 이십세기말까지 서민과 함께하였다. 이 건물은 이십세기약방을 개업하신 일산 이종현 선생께서 1959년 신축한 현대식 2층 건물이며 당시에는 보기 드문 양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후 변경과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신축 당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뒤에 붙은 건물은 약방이 번창해 생긴 건물로 1966년 7월에 건축되었다. 약을 보관하는 창고로 만들었지만 70년대 후반 일부를 개조해 살림집으로 사용되었다. 2017년 4월 한의원으로 리모델링되어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걸 이렇게 유지하다니,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곳에 금방 마음을 빼앗겼다. 비치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비치는 '혹시 정말로 공간을 할 생각이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우리의 인천 여행은 시작되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공간을 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십세기약방의 숨겨진 공간으로 입장 중. 왼쪽이 약방이고 오른쪽이 현재 동양가배관이 들어간 건물이다.



그저 좋아서 하는

선택도 있으니까


그렇게 몇 번, 이곳을 오면서 우리는 점점 더 이 동네가 좋아졌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도,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간판과 건물도, 곳곳에 숨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좋았다. 파면 팔수록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재미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와 문화를 좋아하는 우리와 잘 어울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맞으니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들어가게 된 공간은 아주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다고 한다. 공간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이십세기약방 옆 건물에 서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며 "그 공간에 관심 있어요? 약방에 물어봐요. 그런데 아마 안 줄걸요?"하고 말할 정도였다. 정말 우연히, 그 시점에 지원 사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Before  After


여름 내내 공사를 하고, 2021년 8월에 가게 문을 열었다. 오픈하는 날,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붙이며 시작을 알렸다. 지금도 이 글은 가게 한 쪽에 붙어 있다.


동양가배관이 자리잡은 배다리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 있는 느린 동네입니다. 오래된 것을 부수거나 버리지 않고 새롭게 되살리는 다정한 사람들, 헌 책과 문구를 사랑하는 가게들이 이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 곁의 아름다움과 전하고 싶은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또한 이곳에서 배다리라는 동네의 매력을 발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게 문을 열고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왜 배다리예요?"라는 질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저는 동양가배관이 생겨서 정말 좋긴 한데, 왜 서울이 아니라 배다리로 온 거예요?"라고 묻는 동네 분도 있었다. 얼마 전에 방문하신 분은 "이 동네가 최근 재개발이 많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런 것도 고려해서 공간을 오픈하셨나요?"라고 물어보셨는데 사실 나는 그런 것에 둔한 사람이다. 재개발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이 동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 기준에서의 이유들은 많지만, 어떻게 보면 딱히 없기도 하다. 그게 일반적인 기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동 인구도 없고,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상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을 지나는 분들은 대부분 고령층이다. 


그래서 이유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냥 '좋아서'인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일들의 처음은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나면 이런저런 분석이 덧붙여지는 것뿐. 가끔은 우리 또한 '이 선택이 맞았던 걸까?' 싶은 날도 있지만 어느덧 1년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꾸려왔다. 그 이야기를 종종 기록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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