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사이먼의 『연관성의 예술』을 읽고
5월,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으로 설정한 것이 바로 '문화기획자로서 경험을 설계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일까?'였다. 나는 스스로를 문화기획자라 믿고, 말하며, 활동하고 있다. 문화기획자로서 올해 들어 했거나/하고 있는 일들은 이런 일들이다.
- 문화역서울284 RTO 연간 프로그램 총괄 기획
- 동양가배관 브랜드 방향성 및 공간 경험 설계
- 동인천 배다리 기반 로컬 비즈니스/콘텐츠 기획
- 『나를 만드는 바스크 요리』 책 기획/편집 및 출판
- 『태국 문방구』 팝업 전시·마켓 기획
- abc zine project 공동 기획
- 서울연극제 열린축제 기획 자문 및 프로그램 설계
- 밑미 <내가 좋아하는 일의 한 장면 찾기> 리추얼 프로그램 운영
- 밑미 리추얼 메이커 발굴 및 콘텐츠 개발
워낙 다양한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함께 일하는 파트너 역시 브랜드부터 문화예술공간, 독립예술가까지 너무 다양하다 보니 나 스스로도 '내 일의 중심은 뭘까' 늘 고민한다. 특히 결과물만 놓고 보면 콘텐츠 기획자나 마케터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문화기획자'로서 일하는 것은 무척 다른 감각이라 느끼고 있기에, 그래서 과연 어느 지점이 다른지 스스로도 이해하고 싶었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었다. 내 일의 목표와 기준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설정하고 싶었다. (무엇을 잘하고 싶고, 잘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시점 같았달까.)
그래서 5월 한달 간 문화매개 이론 공부를 다시 했고, 책 읽기 모임을 계기로 『연관성의 예술』 책도 다시 읽었다. 특히 '연관성' 개념이 큰 도움이 되었기에, 책에서 말하는 개념을 내 방식으로 이해해서 '문화기획자가 경험을 설계하는 방식'이라는 테마로 정리해 보았다. (오랜 숙원사업!) 문화기획자로서 일하는 포인트를 잡고 싶은 분들, 『연관성의 예술』을 재미있게 읽었던 분들에게 영감이 되는 글이길!
참여자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연관성(relevance)'은 수많은 문화예술공간에서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참여적 설계를 컨설팅하며 '박물관 비전가'로 활동하고 있는 니나 사이먼이 꾸준히 탐구해 온 개념이다. 연관성을 만든다는 건, 쉽게 말하자면 '지금 네가 하는 활동/이야기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질문에 답하는, '지속적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과 연관성이 높다고 생각할수록, 사람들은 그 대상과 깊이 연결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타겟(target)을 분석하고, 이에 맞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은 비즈니스/마케팅 영역에서도 하는 일이다. 문화기획자가 하는 일은 무엇이 다를까? 니나 사이먼 역시 '연관성'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연결(connection)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연관성은 '긍정적 인지효과(positive cognitive effect)'를 산출한다고 이야기한다.
"뭔가가 연관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고, 내 삶 속에 의미를 더해주며, 나의 어딘가를 바뀌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하다는 사실 혹은 이미 내가 아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연관성은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주고 새로운 가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준다." (26p)
"연관성은 뭔가 소중한 것으로의 문을 열 수 있을 때만 가치를 발휘한다." (28~29p)
"연관성의 이론가들에 따르면, 연관성의 근본 성질은 익숙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와 새로운 무언가를 연결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정보가 자신에게 얼마나 묵직한 결론을 만들어 내느냐에 관한 것이다. 마음속의 질문에 답하기, 품고 있던 의심을 확인하기,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그리고 자신의 앞길을 결정하기 등이 그것이다." (39p)
이 문장들은 내게 큰 영감이 되었다. '개인에게 소중한 무언가'에 가까워지는 길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반응만을 유도하는 납작한 경험,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한 경험이 아니라 - 마음 속에 질문에 답을 하게 하는 경험, 품고 있던 의심을 확인하게 하는 경험, 자신의 꿈에 가까워지도록 돕는 경험,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경험. 나는 그런 경험을 만들고 싶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줄곧 이야기해왔던 '예술적 경험'과도 맞닿는 표현이었다.
이 책은 열쇠와 방, 전령 등의 심볼을 활용해 연관성 개념을 설명한다. 기획하는 주체의 공간 혹은 일을 중심으로 이 개념을 이해하려고 하면 쉽게 되지 않는다. '참여자'의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읽으면서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 보려고 애썼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방과 그 앞에서 각자의 문을 열고 내면의 세계로 진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문화기획자는 그 과정에서 열쇠를 발견하고, 이에 맞는 문을 찾도록, 방 안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이것이 문화기획자로서 내가 가지고 싶고,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위와 같은 이미지들이 도움이 되었는데,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이다. 두 영화 모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들이 등장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세계로 넘어가도록 도와주는 '문'이라는 장치에 유독 열광했고, 꿈에도 자주 나오는 코드인데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역시 모든 건 연결되는 걸까.)
나에게 중요한 것을 표명하고,
타인에게 중요한 것을 포용한다.
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열망 같은 것이 있다.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중요하지만 상대방 역시 무언가 소중한 것으로 닿을 수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 그리하여 오래도록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이 문장이 책에 나와서 정말 기뻤다.
연관성 구축을 위한 핵심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홍보함과 다른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관심사에 귀 기울임 사이에서 창조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있다. 나의 내부를 외부로 확산함, 그리고 외부를 내부로 포용함이다. (273p)
너무 무겁지 않은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라는 의심과 소극적인 태도를 거두고 이곳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사람들과 연관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튼튼한 중심을 가지고 있을 때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밖으로 발을 뻗을 수 있다." 연관성을 높이기 위한 일이 무조건, 타인만을 기준으로 놓고 일을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
의미를 깨우는
과정을 설계한다.
"연관성은 과정이다. 그것은 문을 단번에 휙 하고 여는 것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시간이 쌓여가면서 서로 연관성이 함께 증가함을 느끼게 된다. 삶을 살아가며 다른 때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방으로 오고 또 오기를 반복해 가면서 말이다. 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더 멀리, 더 방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며 연관성을 길러 나가는 것이다." (65~66p)
"연관성은 멋짐을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연관성의 역할은 어떤 사람과 어떤 대상 사이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사람 안에서 잠자고 있던 의미를 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한다면 우리가 나누고 싶은 강렬한 정보에 대한 욕구도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깊은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202p)
이 문장을 읽고는 무릎을 탁 쳤는데, 내가 어렴풋하게 '단기적으로 빠르게 결과물을 개발하는 일보다 오래도록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해왔던 것을 명확하게 표현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순간에 '터지고' 그 이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시 발걸음하지 않게 하는 기획이 아닌 계속해서 관계 맺고 싶고 오고 싶게 하는 기획을 하고 싶다.
연관성을 높이고자 하는
커뮤니티를 찾고, 진정으로 이해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대목이자, 공감했던 부분이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책에서 커뮤니티를 정의하는 방식도 좋았고, 접근하는 태도에도 많이 공감했다. 실제로 내가 내 일 안에서 경험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커뮤니티의 모든 사람과 개별적으로 이야기하여 그들 각각의 요구나 필요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꿈과 욕망의 신체들은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파악한다.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이다. 커뮤니티란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징과 그들 사이의 연결 강도를 이용해 규정된다. 뭔가 비슷한 어떤 면을 가지고 있고, 소속감 또는 인적 연대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바로 커뮤니티이다. (118p)
이미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커뮤니티와의 연관성을 더 높이고 싶은 경우, 우리는 그 내부의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이미 알고 있는가? 연결된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 목표, 그리고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식별 가능한 지도자나 대표자가 있는가? (121p)
새로운 커뮤니티에 대한 접근권을 얻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길은 그들의 관심에 맞춘 프로그램이나 홍보 캠페인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관계의 형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커뮤니티와 알아가기를 시작한다고 해서 언제나 프로모토레스와 같은 공식적 프로그램을 활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먼저 밖으로 나가면 된다. 관심이 있는 커뮤니티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그들의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보라. 지도자와 그들이 신뢰하는 조직에 대해 파악해 보라. 그들의 관심과 우려에 대해 청취해 보라.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하 우리의 이해가 더 깊어질수록, 그들과 우리가 연결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보다 적절히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121p)
책에서 소개된, 워키건 공립도서관(Waukegan Public Library)이 시도한 프로모토레스(Promotores) 프로그램 사례도 흥미로웠다. 그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도시의 인구 50% 이상이 남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참여도가 낮은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도서관을 직접 경험해 본 남미계 사람을 영입하여, 그가 경험한 바를 커뮤니티 안에서 전파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전담 팀을 꾸려 다른 남미계 성인들과 희망과 꿈,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를 도서관의 프로그램 기획에 반영하였다. 피드백을 받아 실제 기획을 개선하기도 했다.
이 사례를 읽으면서 내가 지난 몇년 간, 커뮤니티 기반의 기획 작업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획하기에 앞서, 그 기획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의 욕구를 반영한 기획을 해왔다. 이 태도를 계속해서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게 나의 색깔이자 특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바깥으로 나가 커뮤니티를 직접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것을 기획에 반영하는 작업은 올해 꼭 시도해 보고 싶은 작업이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은 궁극적으로 문화예술기관은 '공공성'이라는 소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홍보/마케팅 영역에서 이야기하는 '타겟팅'과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모은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부분이다. '공공성'과 '공공공간'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조금 더 파보고 싶다.
어떤 커뮤니티와 새로 관계를 맺고자 할 때 타기팅의 방식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의 관심이나 필요에 대해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문과 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을 하나의 큰 방으로 안내하고 그 방에서 우리 모두가 내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괴상한 가구들로 방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일곱 살 어린이, 17세의 청소년, 그리고 70세의 노인 모두가 박물관 안에서 '내 집처럼'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 박물관은 기꺼이 청소하기도 포기할 것이다. 우리는 박물관을 두고 빽빽한 메뉴판을 가진 식당과 같다고 즐겁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뭔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들은 메뉴의 모든 음식을 다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충분히 즐거운 경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69p)
니나 사이먼은 '박물관'으로 상징되는 문화예술공간을 기준으로 이 개념을 풀어가고 있지만, 브랜드/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일에 적용해볼만한 인사이트가 많다.
요약하자면 사람들과의 연관성을 높이고 싶다면 먼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명확하게 표명하고 (정체성 및 미션 확립) / 연결되고 싶은, 적합한 커뮤니티를 찾고 (타겟 설정) / 그들이 가진 열쇠를 진정으로, 깊이 이해하고 (키워드 및 숨은 욕망 분석) / 그 열쇠에 딱 맞는 문을 만들고 (주제 및 컨셉, 메시지 기획) / 그들이 문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문을 잘못 열었다고 느끼지 않도록 환대하며 (가이드 및 안내, 적절한 매개자 배치, 입장 내러티브 등) / 그들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장치들을 제공해야 한다. (연관적 경험 설계)
이 과정은 단 한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의미와 가치를 만들고, 연관성을 높인다. 또한 연관성을 구축하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을 바꾸기도 하고 또 지키기도 하면서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