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리 Nov 18. 2024

로컬 활동의 시작은 탐구로부터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보면 자주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텃세는 없었나요?"라는 질문이다. 지역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바로 '어떤 방식으로 지역에 다가가야 하는가'인 것 같다. 우리도 지금은 지역에서 이런저런 협업도 문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협업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제 막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갑자기 지역을 사랑하게 된다거나, 지역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여러모로 어색하지 않은가.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Step 1.
지역 알아가기


지역에 공간을 오픈하고 1년 정도는 '안녕, 배다리!'라는 이름으로 탐색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지역에도 우리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들인지 소개하고 싶었고, 우리 역시 지역에 어떤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지, 이곳만의 문화는 무엇인지 알아가고 싶었다.


손님으로 만난 지역 연구자에게 동네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예술가와 함께 지역을 탐색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도를 그리는 아트 워크숍을 하기도 하고, 지역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는 작은 재즈 콘서트를 열기도 하고, 지역의 책방을 투어하며 함께 새로운 북 페스티벌을 상상해보는 토크 프로그램을 하기도 했다. 


배다리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공간을 만들면서 새로운 ‘동네’의 감각을 배워가는 중이다. 이곳은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전력질주하는 서울의 삶에 익숙한 나는 종종 놀라고 당황하기도 하고 반하기도 한다.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을 알아차리게 되고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하는 요즘. (2021년 8월 25일의 기록)



지역에 우리라는 사람과 우리의 동료 창작자들을 소개하고, 반대로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동네 이야기를 들으며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는 손님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 우리에게는 특별하고 재미있는 것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흔하고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Step 2.
지역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그렇게 활동을 하다보니 하나 둘, 취향이 맞는 지역 사람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인천 스펙타클'을 운영하는 이종범 기획자였다. 그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인천 스펙타클'에는 문화기획자의 시선으로 소개하는 인천의 다양한 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콘텐츠가 많아 '요즘 인천의 재미'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동양가배관이 공간을 오픈했을 무렵에는 우리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올려 주기도 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 인천의 즐거움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그의 활동을 보며 지역의 문화를 만드는 일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외부의 좋은 것을 툭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있던 것을 잘 엮어내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판을 만드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동양가배관에서 1분 거리에 공간 '스펙타클타운'을 만들면서 우리는 이웃이 되었다.


배다리에서 실험적인 예술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공간 운솔'의 고민수·오휘빈 작가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순간도 기억이 난다. 공간 운솔은 우리보다 1년 정도 일찍 지역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했는데, 거친 질감의 벽과 매번 다르게 펼쳐지는 실험적인 전시가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못도 박으면 안되고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곳에서 자유롭게 전시하고 싶어서 철거한 벽을 그대로 유지하며, 작가들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꾸려나가는 태도가 멋있었다.


유년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인천 학익동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아카이브하며 로컬 아키비스트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곽은비 작가도 이 시기에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인천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그들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을 소개 받기도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맛집을 따라 다니기도 하고, 함께 산책하기도 하면서 점차로 지역에 가까워져갔다.




Step 3.
작은 협업 시도하기


그렇게 관계가 생겨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아이디어도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날, '인천 스펙타클과 이웃이 된 기념으로 무언가 함께 해볼 일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인천 스펙트클에서 소개해온 인천의 이야깃거리를 동양가배관에서 맛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마침 인천 스펙타클에서 '두근두근 마계인천'이라는 주제로 두번째 매거진, <spectacle>의 발간과 기념 전시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전시 기간에 맞추어 '달콤쌉싸릇한 마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창작 음료를 개발해 보기로 하고, 로컬 페어링 프로젝트 '인천음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결과로 2개의 음료를 만들었다.


마계魔界

<spectacle> vol. 2 ♡두근두근 마계인천♡ 속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커피, ‘마계魔界’를 소개합니다. <spectacle>에서는 ‘마계인천’이라는 테마로 편견과 진실 너머 인천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인천의 ‘스펙타클’을 표현하기 위해 독특하면서도 다채로운 향미가 특징인 인도네시아산 생두를 주재료로 사용했습니다.‘마계인천’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칠고 진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다크하게 로스팅하되, 입 안에 다크 초콜릿과 같이 진한 단맛의 여운이 남도록 구현하였습니다. 알면 알수록 매혹적인 인천의 매력처럼요.
서해 갯벌 스무디

인천 하면 바다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거 아시나요? 인천에서 자란 어린이들에겐 서해 갯벌에서 놀던 추억이 하나씩 있다는 거. 서해 갯벌 스무디는 어린 시절 인천의 바다를 상상하며 만든 창작 메뉴입니다. 서해 갯벌에서 뛰놀던 추억의 ‘고소함’과 인천의 ‘짠맛’을 느껴 보세요. 생긴 건 좀 ‘마계’스러워도, 맛은 은근히 중독적입니다.

Material 흑임자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비트 소금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작은 협업을 해보자'며 가볍게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다음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인천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인천 스펙타클' 덕분에 포스터 디자인부터 현장 운영, 사진 기록에 이르기까지 인천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과 협업할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 지역과 한 달음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해 봤지만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이렇게 재미있게 즐겨주고 반응을 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개발한 음료를 맛보는 테이스팅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우리와 한 팀이 된 것처럼 응원해주고 피드백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해갯벌스무디'는 인천인들의 '절대 없애면 안 된다'는 열렬한 반응으로, 여름마다 판매하는 정식 메뉴로 등록하게 되었다. '좋은 로컬 콘텐츠를 계속해서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동양가배관을 오픈하며 배다리에 거점이 생겼지만 아직은 여행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해바라기도 신기하고 문구점도 신기하고 이곳의 일상에 무덤덤하지 않은 내가 좋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도 분명 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이 동네의 매력과 이곳에만 있는 경험들을 알려주고 싶다. 배다리로 여행을 올 핑계를 만들어 주고 싶다. (2021년 9월 2일의 기록)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바라보면서도,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으려 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지역에 처음 발을 내디딘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아직 이 지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알아가고 싶다.'라는 태도로 지역의 문화를 탐구했고 그런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었다. 이렇게 지역을 알아가는 시기를 거쳐 로컬 콘텐츠를 만드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 우리는, 다음 단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지역의 정서가 담긴 공간 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