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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 따뜻한 손길 아래에서

아롱이와 그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지켜낸 사랑의 흔적들

by 최국만


우리 집 고양이 ‘아롱이’는 처음부터 집 안에서 함께 지냈다.

작고 여린 몸으로 소파 사이를 뛰놀며 우리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지,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롱이가 성묘가 되자, 특유의 냄새와 함께 밤새 울어대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롱이를 베란다로 내보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잠시일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롱이가 새끼를 밴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아롱이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 순간부터 아내는 아롱이의 몸짓 하나, 호흡 하나까지 유심히 살폈다.

방 한쪽에 깨끗한 수건과 따뜻한 이불을 겹겹이 깔고

“괜찮다, 여기에 있어라” 하듯 조용히 안정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밤.

아롱이는 조용히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혓바닥으로 미처 마르지 않은 새 생명을 살려내고,

작은 울음이 젖을 찾도록 등을 밀어붙이고,

그 작은 몸으로 생명을 지켜내고 있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아롱이는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품고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작은 생명들이

엄마의 체온을 더듬으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랑임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섯 마리의 새끼였다.

모두 데리고 살 수는 없었고,

시골은 이미 고양이가 넘쳐났다.

장터로 보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웃들에게 네 마리를 맡겼다.


남은 두 마리는 끝내 장날 동물장수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롱이는 집 안 곳곳을 헤매며 새끼들을 찾았다.

심지어 남아 있던 새끼들을

2층 다락 이불속 깊숙이 숨겨두기도 했다.

그 모습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롱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후로 10년.

아롱이는 지금 우리 집의 가장 오래된 ‘어른’이다.

우리와 함께 계절을 겪고,

함께 늙어가고 있다.


아내는 아롱이 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버려지고, 다치고, 잊혀진 생명들에게 늘 마음을 내주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도로 옆 눈밭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차에 스친 건지, 병든 건지,

작은 몸이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스쳐 지나갔다.

바람도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아내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 아이, 차갑겠다….”


그 말 한 마디에

그냥 품에 안아 데리고 돌아왔다.

작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미음처럼 부드러운 국물을 숟가락 끝으로 떠 넣고

몸을 비비며 체온을 불려줬다.


며칠 동안 아내는 밤을 지새우며 그 아이를 돌봤다.

그 아이는 다시 살았고,

살아난 몸으로 조심스레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어느 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아내는 그 뒤로도 수없이 새들을 위해 보리쌀을 챙기고,

겨울 산 속에 사료와 시래기를 놓아두고,

길고양이를 보면 손끝을 먼저 내밀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며 깨달았다.

생명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존엄이었다.


사진 속에 의자 아래서 서로를 의지하던 아롱이의 첫 새끼 두 마리가

가끔씩 마음속에 떠오른다.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있을까.

따뜻한 이불 위에서 잠들고 있을까.

혹은… 겨울 길 위에서 홀로 서 있지는 않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한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들에게도 닿아있기를.


누군가의 마음 속에도

그 작은 생명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사랑처럼 남아 있기를.


사랑은,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살아남는다.

아롱이도, 아롱이의 새끼들도,

그리고 아내가 품에 안았던 그 작은 생명도

지금도 우리 마음 속에서

따뜻하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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