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색즉시공, 아내는 그 말을 붓으로 썼다

병 속에서도 지켜낸 아름다움

by 최국만


아내는 반야심경을 다 외운 사람이다.

불경을 단순히 암송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행간의 뜻을 삶 속에서 이해한 사람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녀에게 불교의 ‘공(空)’과 ‘무상(無常)’의 사유는 글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고.


암이 발병하기 전, 아내는 그림을 그렸다.

새, 말, 호랑이 같은 살아 있는 생명들을 세필로 정교하게 그려냈다.

붓끝에서 피어나는 털 한 올, 눈빛 하나까지도 살아 움직였다.

그림 앞에 서 있으면 마치 그 생명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시절, 나는 막 퇴직을 하고 아내와 함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던 때였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한 적이 없었다.

그저 오랜 세월 감각으로 쌓아온 선의 깊이, 색의 감수성으로

그림을 그리면 작품이 되었고, 색을 쓰면 이야기가 되었다.

아마추어라 하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전문가라 하기에는 너무 겸허했다.

그림 속에는 늘 ‘생명’과 ‘기도’의 결이 함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이 찾아왔다.

아내는 붓을 놓고 바늘을 들었다.

그 이유를 나는 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묻지 못했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철학적 변환,

삶의 무게 속에서 바뀐 예술의 방향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세필화의 정교한 선은 이제 바늘의 한 땀으로 옮겨왔다.

물감의 색은 실의 빛깔로 바뀌었고,

화폭 대신 천 위에 생명이 피어났다.

그녀의 자수에는 여전히 생명이 있었다.

다만 그 생명은 외부의 동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내면에서 피어난 또 하나의 생명이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왜 그녀는 붓을 버리고 바늘을 택했을까.

그건 아마도 “지워지지 않는 예술”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은 덧칠로 사라지지만,

자수의 실은 찢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삶도 그렇다.

고통을 덧입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실 한 가닥에 자신의 숨결을 담았다.

그 실이 천 위를 지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평온해졌고,

그 바늘질은 불경의 한 구절처럼 반복되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녀는 천 위에서 ‘공(空)’을 실로 수놓고 있었다.


아내는 병상에서도 웃는다.

그리고 손끝으로 실을 잡는다.

그 모습은 내게 기도의 형상 같다.

불경을 읽는 대신,

그녀는 바늘로 하루를 엮고,

실로 자신의 마음을 엮는다.


그녀의 자수는 결국

붓으로 그리지 못한 삶의 마지막 그림이다.

그건 고통을 미화한 예술이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고 품은 예술이다.

그녀는 오늘도 묵묵히 한 땀을 꿰맨다.

그 한 땀이 끝나면, 또 한 땀을 놓는다.

그것이 그녀가 배운 불경의 진리요,

삶을 대하는 가장 깊은 철학이다.


“바늘 하나로 나는 오늘도 산다.”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말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