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의 봉사에서 시작된 인연, 그리고 겨울에 남은 이야기
불교에서는 세상 모든 인연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작은 씨앗 하나에도,
한 번의 만남에도,
한 사람의 손길에도
모두 ‘연기(緣起)’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올겨울, 나는 그 연기의 깊이를
또 한 번 마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아내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남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아내는 30대 후반,
적십자 봉사회 ‘청나회’에 가입했다.
천성적으로 남을 돕는 일을 좋아했고,
가난한 이웃과 아픈 이들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늘 따뜻했다.
그 마음의 뿌리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
‘남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라 말하며
가난한 이웃에게 반찬을 나누어주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아내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그 인연이 씨앗처럼 심겨
아내는 매주 청주혜화학교(지체장애인을 위한 공립 특수학교)로 갔다.
몸이 굳은 장애인들에게 물속에서 수치료를 도와주고,
식사 보조를 하고,
수화도 배우며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일만 바라보던 사람이었기에
아내가 어디서 어떤 봉사를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봉사한다더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이 가족을… 도와줄 수 없을까?”
혜화학교에서 식사 보조를 하던 중학생 아이가 있었다.
라이온 킹 주제가를 아주 잘 불렀다는 그 아이.
그런데 그 아이는
중학교 입학과 함께 루게릭병이 발병했고,
동생도 루게릭,
엄마도 같은 병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집을 떠난 지 오래.
아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울음을 삼키듯 말했다.
“여보… 나 너무 마음이 아파.
이 분들을 돕고 싶어.
우리 무언가 할 수 없을까?”
나는 아내의 눈빛을 보고
즉시 알아차렸다.
이건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아내의 마음에서 비롯된,
마치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인연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호소’였다.
나는 취재를 결심했다
그 시기는 마침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쓸쓸한 계절이었다.
나는 방송사에서
매주 시사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겨울이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 특집을 준비하곤 했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단지 도움이 필요한 가정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눈먼 자리’를 보여주는
현실 그 자체였다.
그래서 기획회의에서
2부작으로 다루자고 제안했다.
1부는 이 가정의 현실과 고통,
2부는 장애인 복지의 문제와 대안.
취재팀과 현장을 찾았을 때
나는 눈앞의 현실을 믿기 어려웠다.
13평 시영아파트,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던 세 사람
큰아들은 누워서 잘 수 없었다.
근육이 굳어
몸을 옆으로 기댄 채
앉아서 잤다.
엄마는 허리를 펴지 못해
기듯 일어났다가
앉아서 밥을 지었다.
주방도 그녀의 키와 병에 맞춰
낮게 개조돼 있었다.
둘째 아들은
말은 느렸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아내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분 알아요?”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네… 이 아줌마.
나 밥도 먹여주고, 얼굴도 씻겨주고…
참 좋아요.
너무 잘해줘요.”
가슴이 저릿했다.
아내가 건넨 작은 손길이
이 아이에게는
세상의 마지막 온기 같았던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가정을
날이 밝기 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촬영했다.
그들의 삶은
내 가슴을 여러 번 부러뜨렸다.
방송이 나가자, 겨울에 ‘따뜻한 파문’이 일어났다
생방송 중에도
방송국 전화는 멈추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습니다.”
“성금은 어디에 보내면 되나요?”
“같은 장애아를 둔 부모로서…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그날,
시사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깊이 깨달았다.
방송은 사람을 흔들었고,
사람은 사람을 움직였다.
후에
그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러 곳에서
도움이 들어왔어요.
먹을 것도, 성금도…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도움을 받은 쪽보다
더 깊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이 모든 인연의 시작은… 아내였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가족을 몰랐을 것이다.
아내의 봉사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의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의 사랑이
시사프로그램을 움직였고,
방송은 다시 사람들을 움직였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진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작은 마음이 큰 변화를 만들고,
선한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을 낳는 것.
아내는 그저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봉사”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손길이
어느 가족에게는
겨울을 버티게 하는 빛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빛이
내게도 큰 깨달음을 남겼다.
겨울은 차갑지만, 인연은 따뜻하다
이제 아내는 아프다.
나는 매일 아내의 손을 잡으며
그날 아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아줌마 참 좋아요.
너무 잘해줘요.”
아내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다.
나에게도,
세상에게도.
나는 믿는다.
아내가 회복되면
또 누군가를 향해
따뜻한 손을 내밀 것이다.
그때 나는
또 다른 인연을 만나
또 다른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
겨울은 차갑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건네는 인연은
얼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아직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