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을 하던 사람이 돌봄을 받게 되었을 때
아내가 암 진단을 받은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그 시간은 마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붙들고 버티며 지나온 ‘견뎌낸 시간’이었다.
아내는 3개 면(面)을 관할하는 노인 돌봄 맞춤 센터 팀장이었다.
약 200명의 어르신을 돌보고,
10명의 생활지원사를 이끌고,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노인복지학을 전공했고
요양원 원장까지 했던 아내에게
노인들의 삶은 일이 아니라 ‘사명’에 가까웠다.
그러던 사람이 조직검사 결과지를 들고 돌아온 날.
아내는 말없이 사표를 냈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손이 떨렸고, 눈빛은 멍했고,
그 어떤 위로도 닿지 않았다.
작은 도시의 빠른 소문, 그리고 끝없는 위로 전화들
인구 3만의 괴산에서는
아무리 작은 소식도 금세 퍼진다.
하물며 모든 어르신들의 마음에 깊게 자리 잡은
‘그 팀장님’이 아프다는 소식은
하루 만에 마을을 가득 채웠다.
집에는 하루 종일 전화가 울렸다.
“팀장님, 소식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이제 일은 걱정 마시고 몸부터 나으셔야죠.”
“그동안 고마웠는데,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아내는 아픈 몸으로 전화를 받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화를 내가 대신 받았다.
“지금은 몸이 힘들어서요…
조금 지나면 꼭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말만 수십 번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마다 깨달았다.
아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들에게 나누고 살아왔는지를.
살면서 이렇게 많은 ‘정’을 받을 수 있을까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어떤 이는
“속 편하게 드세요.”
하며 죽을 끓여다 주었고,
어떤 이는
“몸에 좋다”고 염소탕을 가져오고,
또 어떤 이는
떡, 찰밥, 옥수수, 과일을 놓고 갔다.
심지어 겨울 김장을 못 할까 봐
김장 김치를 통째로 가져오는 이도 있었다.
그 사랑과 정성은
말 그대로 벅찼다.
우리가 이만큼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던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내는 그 마음에 ‘작은 손’으로 답했다
1년 동안 항암이 끝나고
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올해 8월 말.
아내는 조용히 바늘과 실을 꺼냈다.
“나도…
그분들에게 뭔가 작은 보답을 하고 싶어.”
그리고 밤마다
키링과 부로치, 소품 지갑,손뜨개 수세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내는 읍내에 가서 천을 고르고,
뜨개실을 사오고,
곁에서 내가
“여보, 밤 10시 넘기지 말고 쉬어…”
라고 말해도,
아내는 쉬지 않았다.
하루에 몇 개씩,
몇 밤을 새워가며
정성을 담아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천천히 되갚는 마음의 징표였다.
가까운 분들에게는 직접 찾아가 인사드리고,
멀리 있는 분들에게는 택배로 보냈다.
주고받는 손길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났다
한 지인은
아내가 직접 만든 키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팀장님이 평소에 잘하신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마음을 담아 주시니
더 감격스럽네요…”
그 말에
아내의 눈가에도 금세 눈물이 맺혔다.
기꺼이 주었던 손길이었고,
기꺼이 받았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다시 나누는 것만으로
아내는 어느 때보다 많이 웃었다.
누군가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밤마다 기도를 해주었고,
누군가는
힘이 되는 음식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 정성은
아내의 몸보다 먼저
아내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 1년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증명이었다
우리 부부가 지나온 1년은
쉽지 않았다.
몸이 아프고,
마음도 흔들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많았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깨달았다.
사람에게 받은 사랑은
결국 사람에게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내는 지금도
아직 다 못 드린 분들을 위해
시간만 나면 바늘과 실을 든다.
그 작은 키링 하나에도
아내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아내의 삶을 지켜주었듯,
이 작은 정성 또한
누군가에게 깊이 닿기를 바라면서.
병과 싸우는 1년 동안
아내는 많이 아팠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더 많이 살아났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며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