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꿀꺽하우스 도전자. 이번엔 어떤 공간이죠?"
"아 그러니까, 발효실은 이쪽에…, 숙성실은 이쪽에 이렇게 둬야 작업 동선이 편하고…… / 꿀꺽하는 모양새처럼 바 테이블 구조도 직선보단 곡선이 강조됐으면 좋겠고…… / 양조장과 바 공간이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만들어 가교의 이미지를 부각하고…… / 마감을 구리로 하고 산화시키는 거예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술이 발효되는 것처럼 점점 비취색으로 변하는 구리를 보며 공간도 술과 함께 익어간다는 의미를…"
꿀꺽하우스는 말했다.
"……"
인테리어 업체 대표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실내 인테리어라곤 10평 남짓한 자취방 원룸 꾸며본 일이 전부였지만서도, 꿀꺽하우스의 보금자리만큼은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가며 만들어 보고 싶었다. 팀원들과 함께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고, 건축이나 디자인 관련 매거진도 열심히 살펴봤다. 탐독과 탐방을 거쳐 갈수록 보는 눈은 높아졌으면서도 반대로 입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이건 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이게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인테리어 업체와 미팅을 진행할수록, 이후에 공사가 진행될수록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지만 시간, 비용, 기술적 문제와 같은 장애물들 앞에서 번번이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역시 사람은 몰라서 용감한 게 아니라 얕게 알기 때문에 용감한 법이랄까.
꿀꺽하우스는 양조장이다. 근데 이제 Bar를 곁들인. 초기 팀원들과 함께 공간을 구상할 때부터 우리는 브루펍(브루어리Brewery와 펍Pub의 합성어, 매장에서 직접 양조도 하며 술을 판매하는 공간)의 형태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단순히 술을 만들어 유통 판매하는 양조장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우리의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곳. 꿀꺽하우스만의 가양주를 선보이고 우리들만의 문화를 소개하며 서로를 연결하는 것, 그런 가교의 역할을 하는 곳. 거창하고 원대한 비전까진 아니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하고 우리를 찾아주는 손님들이 조금 더 재미를 느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기에 브루펍 컨셉이 불가피했달까.
자본이 넉넉치 않은 사업 초반, 소규모로 양조장만 차려 일을 진행했더라면 아마 물론 더 빠르고 쉬웠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브루펍 공간을 꾸리는 동안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참 많이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확고했다. '우리들만의 가치를 빚어내는 공간, 문화를 양조해내는 곳'. 이 문장 한 줄을 오랫동안 붙들며 버텨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명확했던 만큼, 초기 인테리어 컨셉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났다. 술을 만드는 곳과 마시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있지 않은 형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밥알처럼 찰싹 달라붙어 끈끈해지는 곳. 서로 다른 것들끼리 경계를 허물고 연결됨으로써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세상을 좀 더 유연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따스한 집의 모습을 원했다. 우리가 꿈꾸는 공간에 대한 키워드들을 뽑아내 보니 '무경계, 확장성, 연결, 점성, 유연함' 등과 같은 것들이었고, 이 메시지들을 디자인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에 대해 집중했다.
좌석 수가 크게 줄더라도 일반적인 테이블보단 바의 형태로, 그리고 그 바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고 홀과 키친을 자연스레 이어주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가교 역할을. 경직된 직선의 형태보단 꿀꺽하는 모양새, 부드럽게 흐르는 물길처럼 유연한 곡선의 모습으로 디자인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놀이터처럼, 바를 다채롭게 이용해주길 원해 편히 앉아서 마시기도 좋고 혹 서서 마셔도 불편함이 없도록 높이를 조정했다. 손님들 각자가 원하는 뷰 포인트에서 자유롭게 이용했으면 해 지정석과 같은 구획을 따로 정해놓지도 않았다.
바 테이블 정면으론 통유리창을 크게 냈다. 술이 익어가는 것처럼 계절과 함께 익어가는 광안리 시내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실제로 술이 익어가고 있는 양조장의 전경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 둘 사이에 자리한 바 공간은 그런 모호한 경계선, 혹은 그 둘을 잇는 흡사 육교와 같은 이미지처럼 느껴지길 바랬다.
낮에 이곳에 앉아, 큰 유리창을 통해 안으로 들이닥치는 햇살을 가만히 맞고 있노라면 어쩐지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낮에 손님들을 받고 있지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문을 열어놔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꼭 이 따스한 햇살을 만끽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바 테이블 이외에도 공간 한편엔 널따란 원테이블을 하나 두었다. 혹 건강상의 문제나 다른 이유로 바 좌석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그리고 여러 쓰임새를 위해 구상한 공간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다양한 클래스를 열고 소규모 시음회(벌써 두 번이나 진행했다)도 자주 기획할 예정이다. 낮에는 우리 팀원들의 집무공간이 되기도 하고, 함께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회의를 가지기도 한다.
바 공간과 달리 좀 더 차분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싶어 아치 형태의 천장과 함께 옆 벽면의 디테일을 살렸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바 공간이 마당, 거실과 같고 이 원테이블 자리는 그것보다는 좀 더 내밀하고 안락한 안방이나 공부방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구상했다.
꿀꺽하우스 브런치 1화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브랜드 컬러는 비취색이다. 브랜드 키 컬러인 만큼 꿀꺽하우스 공간 속에 녹여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대놓고 드러내자니 자칫 유치해 보이진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던 중 구리를 떠올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산화되며 비취색과 같은 색상을 띠게 되는 구리로 우리의 색을 드러내 보자! 마치 술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발효되는 그것처럼 긴 세월 천천히 산화돼 가는 구리의 모습이 술과 본질적으로 닮아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연찮게 떠올린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의미 부여하기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하하.
그렇게 해서 두 메인 기둥의 일부분과 입구 현판을 구리로 마감하고 그 위에 광안리 해변의 바닷물을 듬뿍 발라주었다. 술이 맛있게 잘 익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영롱한 비취색이 이쁘게 잘 나와주었으면!
글을 적다 보니 2022년 4월 28일, 철거 작업이 진행되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완성된(줄 알았던) 디자인 도면을 손에 꼭 쥐고서 철거 현장을 지켜보았다. 음악 교습소였던 이곳이 우리술 양조장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묘한 감정이 일었다. 문득 '새 술은 새 부대에' 같은 말 따위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괜히 한번 마른침을 꿀꺽 삼켜보고 위험천만한 폐자재들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누비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온갖 투박하고 거친 것들이 우리를 덮쳐와도 굳건히 버티고 힘차게 누비며 나아가길, 하여 닳고 닳을지언정, 마모되기보단 연마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