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쉴 새 없이 글자를 좇아 읽었다. 빈틈이 생기고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싫어서. 당장 눈앞의 전단지라도. 무엇이든 글자를 눈으로 따라 읽으면 마음이 편했다. 나이 들어 지금은 오히려 글자를 읽지 못한다.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서 표시하지 않으면 내 시선이 글자들을 뚫어버리고 멍해진다. 당연히 내용이 눈에 안 들어오고 눈으로 총을 쏜 듯. 구멍 난 여백들 사이로. 쪼개진 글자들이. 덩그러니. 이내 2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 폰을 들고. 스크롤. 휘적휘적. 눈에. 걸리지. 못하는. 숱한. 이미지들.이.그대로.흘러.내리.ㄴ다.
나를 쫓아오는 듯한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언제나 나와 함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불안을 피해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장 안전한 곳은 나의 머릿속. 글자들이 성벽을 쌓아 올리고 그 안에선 나만의 무도회를 벌였다. 때로는 치정극이 벌어져 피의 무도회로 변질되고 성벽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든 자극들이 나를 현실에서 끌어올려 숨 쉬게 해 줬다. 여러 가면을 쓰고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양한 인격을 연기하며 나만의 세상을 그렸다. 현실은. 도무지. 알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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