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부터, 여기부터 -
차곡차곡 일상
11월 1일 11시.
1이 다섯 번이나 겹친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토요일 오전이다. 가을을 느끼고 싶어 믹스커피를 진하게 타 베란다 앞에 섰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세상은 티끌 하나 없다. 아주 푸른 하늘과 적당히 퍼져 흘러가는 구름들, 아직은 초록을 유지한 나무와 그 사이를 기분 좋게 지나가는 행인들. 정적인 장면과 동적인 장면의 조화로 탄생한 가을풍경이 담긴 이 공간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한다. 커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연속사진이 찍히는 듯 미세하게 다른 장면이 연출되므로.
그런데 날씨가 너무 투명해서였을까! 오늘따라 갑자기 베란다 난간의 탱탱한 거미줄과 안에 빨려 들어간 각종 벌레들, 까맣게 자리 잡은 먼지들이 눈에 띄었다. 흐린 날이었음 그냥 지나쳤을 텐데... 맑고 청명한 날씨에 거슬리는 옥의 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을 음미하던 나는 사라지고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머리를 질끈 묶고 팔을 걷어붙이고 걸레들을 챙겨 나왔다. 이사 온 지 3년이 넘었건만 거의 닦은 적이 없다 보니 시커먼 먼지덩어리들이 제집인 양 자리를 잡았나 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우선 난간의 봉부터 걸레로 닦고, 제가 왕인 듯 쳐놓은 탱탱한 거미줄도 제거했다. 끈적이는 실(거미줄)이 손에 닿는 순간 놀람을 들키지 않으려 표정관리에도 신경 썼다. 난간의 봉과 거미줄을 치우고 바닥에 떨어진 자잘한 벌레들을 모아 휴지통에 넣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갔다.
대청소나 구석청소를 잘 안 하는 '나'이지만 feel 받으면 이렇게 집안을 뒤집어놓을 정도로 닦아댄다. 그럼 오늘은 무엇 때문이냐고? 음~ 가을하늘이 눈부시게 맑고 밝아서 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아침에 본 내 인생달력에 있다.
날짜와 삶을 대하는 자세(태도)가 한 줄씩 쓰여있는 달도 없고 요일도 없는 심플한 달력이지만 그 단순함 속엔 심오함이 엿보인다. 그래서 매일 아침 그날의 내용을 되뇌며 하루를 시작한다. 어느 날은 '(요즘) 그게 좀처럼 잘 나아가질 않네'라고 마음을 대변해 주고, 어느 날은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있으면 편해'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며, 월말이 다가오면 '너무 팽팽해도 너무 느슨해도 안 좋아. 마음을 잘 안배하길'이라고 했다가, 31일은 '모든 것이 덕분이야'라고 마무리한다.
그중 오늘의 문장은 '지금부터 여기부터'였다. 첫날이니만큼 깔끔하게 기분 좋게 시작해 보자 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뤄뒀던 청소를 한 것이다.
내 삶이 달력의 내용을 닮아가는 건지 아님 달력이 우리의 삶을 통계적으로 대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린 매일 소소한 일상을 만들어 흔적을 남긴다. 나만의 인생달력이라는 흔적으로.
다시 오전 11시의 나로 돌아와 베란다 앞에 섰다. 이번엔 디카피인 커피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