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의 수습기간을 채우지 못했지만 잠시 쉬기로 결심했던 9월, 백수가 된 저는 돈을 벌 수 있는 궁리를 하다 우연히 법학전문대학원 생활수기 공모전을 발견했죠. 대상 50만원( 대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백수는 한푼이 아쉬웠습니다)을 목표로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결국 수상에는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그래도 정신승리를 해보자면 공모전에 낼 수기를 쓰면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브런치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니 글을 쓰던 그 시간들이 아주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고 믿고싶습니다. 비록 목표했던 대상도 10만원의 우수상도 받지 못한 작품이지만, 어디에라도 남기고싶어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글을 쓴다는 게 저에게는 내적인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과정들이라 힘들고 괴로운 일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이어서 소중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글이 꽤 올라오지 않는 제 브런치를 여전히 구독해주시고 가끔씩 들러주시는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생활수기 공모전
로스쿨에 간 아나운서
“6년을 일했는데, 방송국이 퇴직금을 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 각자 로스쿨에 오게 된 사연을 털어놓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첫날 밤, 30대 중반의 나이에 로스쿨에 온 아나운서를 향한 눈빛은 호기심에서 안타까움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입사 동기인 동료 아나운서 A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방송국이 소송까지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2017년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곧 닥쳐올 미래였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저런 노동법 서적을 뒤적이다 아예 로스쿨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회사 몰래 해야 했던 공부
‘기자와 아나운서로 방송국에서만 10년을 일했는데, 뜬금없이 로스쿨이라니’ 막막했습니다. 로스쿨에 간 지인이 전혀 없었고 회사에 알려질까 두려워 주변에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로스쿨 관련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려봤지만, 나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로스쿨 입학에 성공한 30대 여성의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강원대 로스쿨의 정혜진 변호사, 전남대 로스쿨의 이은의 변호사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줄기 빛이 보였습니다.
3월부터 인터넷 강의를 들었습니다. 법학적성시험의 언어 영역 점수는 조금 올랐으나 추리 영역은 잘 오르지 않아 끝까지 마음을 졸였습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빠르게 지문을 읽어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 토익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리딩 문제 서너 개를 찍고 나온 날에는 속상한 마음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리트 점수가 안정권에 속하지 못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로스쿨 공동 입학설명회는 물론이고, 대학이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춘천으로, 대구로 향했습니다. 자기소개서는 20번 이상 고쳐 썼고,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면접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면접 스터디 3개를 돌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강원대와 충남대 모두 최종 합격했는데, 먼저 결과가 나온 강원대 발표 시간대가 오전 뉴스 직전이었습니다.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화면을 얼핏 보았지만 바로 생방송 스튜디오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오전 뉴스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그 화면을 확인하고서야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무엇보다 팀장을 찾아가 “퇴사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공부와 병행했던 소송, 항소심 승소까지 1266일
로스쿨 입학에 성공했다는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대학 시절, 법 관련 수업은 교양과목으로라도 수강한 적 없던 저는 법학 답안지 작성법도 모른 채 중간고사를 치러야 했고, 그 결과, 참담한 수준의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엄청난 양의 공부량을 채워나가야 했지만 시험 기간 서너 시간만 자고도 버티는 20대 동기들처럼 공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적으로 평가받는 일상이 거듭되면서 자존감이 낮아져 펑펑 눈물을 쏟아내야 잠들 수 있는 날도 있었지만 뛰어난 학생들 틈에서 그래도 이만큼 버티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체력과 시간이 아쉬운 로스쿨에서는 수험공부에만 집중해도 하루하루가 벅차고 힘든데, 소송까지 병행해야 했던 저는 제 상황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2018년 3월, 로스쿨 입학과 동시에 노동청 조사를 받기 시작했고 2018년 12월, 민사소송을 시작했는데 소송은 항소심까지 3년 넘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특히 변론기일 즈음에는 언제나 밤잠을 설쳤습니다. 공로패를 수여하며 ‘회사의 얼굴’이라고 치켜세우던 사람들로부터 “불성실했다. 능력이 부족했다. ”라는 비난을 들을 때면 마음이 쓰라리게 아팠습니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그 과정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 ‘더는 법정에 가지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 대법원으로 견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어려움을 털어놓았는데, 한 재판연구관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이 방청석에서 끝까지 재판을 지켜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든 시간일까요? 그 마음을 헤아려 보신다면 힘든 가운데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후, 저는 떨리는 제 손을 붙잡아줄 동기들과 함께 6번의 변론기일에 모두 참석했습니다.
변호사 시험 불합격의 아픔
방송국을 상대로 한 퇴직금 소송은 1심과 항소심 모두 근로자성을 인정받고 승소했지만, 소송을 진행하면서 건강을 크게 잃을 뻔한 위기가 2번이나 찾아왔습니다. 근로감독관이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기, 극심한 분노로 괴로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나타났습니다. “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신경과, 치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등 6개 병원을 전전했지만 정확한 병명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너무 무서웠는데, 다행히 증세는 1달을 넘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1심 선고 즈음에는 불룩하게 목에 혹이 튀어나와 갑상선 이상 여부를 검사했는데, 악성은 아니라고 하여 또다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낸 저는 변호사 시험에 한 차례 떨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소송을 질질 끌었던 방송국이 원망스러웠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불합격 발표가 난 다음 날, 공부를 시작했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온종일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산책이나 운동을 할 때만 외출을 했는데, 매주 일요일, 친한 동생과 시간을 정해두고 기록을 푸는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외로웠습니다. 커트라인과 점수 차가 얼마 나지 않았기에 다시 공부를 시작할 때,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음 해에는 붙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외로운 싸움에 힘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들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겁을 많이 먹고 들어간 로스쿨이었지만, 저는 도리어 이곳에서 평생 함께해도 좋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노동법학회인 ‘노동법연구회’ 부회장을 맡았는데, 학회원들은 제 소송을 진심으로 지지해 주었고 2018년 고용노동부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출석해 발언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며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동기들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이 있었고 아이 엄마, 아이 아빠도 있었습니다. 로스쿨에 오기 전 인생은 그 모습이 저마다 달랐지만, 힘겹게 공부를 이어가면서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습니다.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어렵고 힘든 상황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가인 법정변론 경연대회 형사부문 개인 최우수상의 영예
2018년 민사부문 예선 탈락을 경험했기에, 2019년 ‘형사부문 도전’은 큰 기대 없이 시작했습니다. 형사재판실무 시험을 앞두고 형사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시기, ‘이렇게 쌓인 지식을 가인 변론대회에서 써먹어보자’라는 동기의 제안은 꽤 그럴듯했습니다. 법학 전공자나 사법고시 출신은 없었지만 서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배려하며 준비했고, 그 결과, 단 6팀이 진출하는 결선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내심 기대를 했던 단체상은 4등상인 자유상 순서에 이름이 불렸고 그래서 개인상은 ‘보나 마나 1등이나 2등 팀에서 나오겠지.’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충남대학교에 김도희!” 제 이름이 들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만큼 수상소감은 무척이나 횡설수설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팀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닫혀있다고 생각했던 벽이 문처럼 열린 경험들
37살의 나이에 로스쿨에 입학한 저는 “정말 들어갈 줄은 몰랐다. 솔직히 실패하리라 생각했다”라는 지인의 부끄러운 고백을 듣기도 했고 지상파 방송국을 상대로 소송하던 시기, “괜히 힘 빼지 말고 적당히 합의하는 게 현명하다”라는 비아냥 섞인 훈수를 듣기도 했습니다. 경쟁자들만 가득할 것 같던 로스쿨에서 오히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을 얻었고,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지금의 연인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닫혀있다고 생각했던 벽은 그렇게 문처럼 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겪어보기 전에는 끝까지 알 수 없는 인생이기에, 조금은 더 무모하고 조금은 더 용감해져도 괜찮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