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통제형 엄마였어. 가족여행을 안 가면 호적에서 파겠다고 하셨고(농담이셨겠지만) 엄마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갈등을 겪어야 했는데,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었어. 어렸을 적 나는 입이 짧고 허약해 자주 아팠는데, 엄마가 약해지시는 때가 '내가 안 먹을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엄마는 추진력이 강하고 생활력도 대단해서 우리 집을 일으켜 세우는 데 엄청나게 헌신한 분이지만, 그만큼 가족들을 엄마의 뜻대로 끌고 가려는 열망이 강하셨어.
통제형 부모의 좋은 점이 있기도 했어.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엄마 탓'을 할 수 있었어. 내가 하고 싶은 선택들이 아니라 엄마가 강요한 선택이었으니까... 엄마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나는 선택에 뒤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었어. 어쩌면 그게 마음이 편하다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보통의 엄마들처럼, 엄마는 '좋은 대학'에 가길 원하셨고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공부를 했어. 나를 위한 공부는 아니었지만 성과가 나쁘지 않았어.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할 만큼의 성적이 나왔는데, 수능시험을 보던 날, 엄마는 우황청심환 2알을 꼭 다 먹어야 한다고 했어. 이전에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2알을 한꺼번에 먹고 시험장에 들어간 나는 1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보는데, 너무 나른했어. 결국 1교시 시험을 망쳤고... 결과적으로 서울대는 가지 못했어.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범대'에 진학했어.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선택했던 것이 인생에 3가지가 있는데, 그중 2가지가 '사범대 진학'과 '방송국 기자로의 취업'이었어. 사범대에 가서 교사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뜻과 달리, 나는 대학에 들어와 '라디오 DJ'라는 꿈을 갖게 되었어. 신문방송학을 이중 전공했고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어. 3차와 최종 문턱에 올라간 방송국이 몇몇 있었지만 2년 동안 끝내 취업에 성공하지는 못했어. 방송기자라도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한 방송국에 지원했는데, 그곳에 덜컥 합격을 하게 되었어. 2년간 어떤 성과도 보여드리지 못했던 것 같은 나는 또다시 죄책감으로 방송국 기자 생활을 시작했어.
3개월의 수습기간은 잠이 부족하고 몸이 너무 피곤해서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수습기간이 끝나고 나서는 더 많은 고민이 매일 밤, 나를 찾아왔어. 라디오 DJ를 하고 싶었던 나의 성향과는 무척 다른 일들을 해내야 했거든. 결국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사직서를 썼는데... 보도국 부장님과 엄마로부터 엄청난 꾸중을 듣게 되었어. 철 모르는 아이의 치기 어린 결정 취급을 받았고, 없던 일이 되었어.
엄마는 1년 더 일해보고 그때 가서도 아니다 싶으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어떤 직장이든 1년을 버티지 못하면 딴 데 가서도 버티지 못할 거라며 '끈기 없고 인내심 없는 아이'를 나무라듯이 나를 타박했어. 지나고 보면 1년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같아 보이지만 그때 내 삶은 지옥이었어. 사지가 모두 꺾인 채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낸다는 느낌이었어. 출근하기 싫어 새벽까지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회사에 나간 적이 있고 우울증 약을 복용했고 수면제를 먹어야 잠에 들었으며 정신과를 찾아간 적이 있어. 다행인지 불행인 건지, 정신과 의사는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을 벗어나라"라고 조언했는데,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 이후로 찾아가지 않았어. 자주 안 좋은 생각을 했고, 나의 불행에 공감해주지 않는 부모에 대한 원망을 키워갔던 것 같아.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에 나는 결국 기자 일을 그만뒀어. 그사이 보도국 부장은 바뀌었는데, 바뀐 부장은 나에게 "네가 아나운서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며 저주를 퍼부었어. 나를 뽑아주셨던 부장님은 한없이 인자하고 아버지 같은 분이셨는데, 그사이 바뀐 보도국 부장은 욕쟁이로 성깔이 고약했거든. 나를 주저앉히려고 그런 강경책을 쓴 것 같은데... 끝내 손에 장을 지지셨는지 무척 궁금하지만, 연락할 생각은 아예 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엄마는 1년 8개월을 근무하고 그만뒀는데도 1달 넘게 나랑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하셨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는 드라마 대사에 나올 법한 멘트를 하시기도 했어. 좀 슬픈 이야기지만, 나는 그때 부모도 내 고통과 불행에 공감하지 못하는 한, 철저히 '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는 나를 위해 희생을 하고 엄마 식의 사랑을 주셨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은 아니었어.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엄마도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셨기 때문에 지금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지는 않아.
그 시기, 엄마와 나는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가 아닌 각자로 '분리'되었던 것 같아. (그 이후, 엄마는 더 이상 나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하지 않으셨고...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해 대학에 가고 석사과정까지 마치셨어. 과정은 괴로우셨겠지만 엄마가 엄청난 노력을 통해 자신의 콤플렉스를 스스로 극복해내셨기에 결과적으로는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내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때 정말 무서웠던 건... 다름 아닌 '엄마 탓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
이미 실패했던 시험에 재도전하는 것이었고 27살의 나이가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 실패하더라도 그 누구의 탓도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어.
정규직인 지역 MBC 기자직을 버리고,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계약직 투성이의 아나운서에 또다시 도전한다. 그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 한 명도 없었어. 외로웠고 몹시 쓸쓸했어.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감당해내겠다고 마음먹는 게 그 당시에는 엄청나게 두려웠던 것 같아.
결과적으로 아나운서가 되긴 했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그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야. 나 역시 나보다도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 먼저 합격하는 걸 지켜본 적이 있고... 노력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다소 운명이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따금 하긴 해.
공감능력은 성인기가 되어서도 계속 발달한다는 걸 엄마를 통해 느껴. 어렸을 적 엄마는 상처가 많은 분이셔서 나에게도 상처를 많이 주셨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시절의 자신과 결별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해 대학에 가고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면서 많이 달라지셨어. 어떤 일이든 끝내 헤쳐나가시는 강한 의지를 보고 자란 덕분에 나 역시 살면서 겪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름의 해답을 찾아나가고 있는지도 몰라.
그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느낄 두려움과 막막함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어.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어렵지만... 내 선택이 옮은 결정이었음을 증명해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들은 더 외롭고 쓸쓸한 것 같아. 그럼에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나 자신'이라고 느낀다면, 그 목소리를 존중해주고 지지해줘도 좋을 것 같아. 오늘도 힘겨운 고민과 선택들 앞에 서 있을 너를 상상하며 글을 쓰다 보니 힘들었던, 그리고 많이 외로웠던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되었어.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때 나에게 미처 해주지 못한 말을 이제야 네게 보내.
사진은 엄마의 대학교 졸업식 날 찍은 사진이고, 저 졸업식에 가기 위해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반을 달려갔어. 엄마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을 특별히 주문했는데, 졸업하는 엄마가 행복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
우리 엄마와의 갈등을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 적어서 엄마한테 많이 미안하지만...(엄마는 다행히 브런치를 모르셔. 제발... 이 글은 보지 않으시길... ) 개인적으로는 엄마를 대단하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이제 와서??? ^^;;;) 엄마와 딸로서는 갈등이 있었지만,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극복한 한 인간으로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엄마에게는 절대 비밀이야.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