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서강석 저)를 읽고
이 책을 덮는 순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는 해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얘기를 하던지, 혼자 뭐라도 끄적거리던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명량,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 서강석 저>를 읽고 난 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온 거실을 빙빙 돌다가 결국 노트북에 앉았다. 원래도 존경스러운 이순신 장군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발견한 이순신 장군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적이 몰라야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삶은 적의 후손들까지도 알아야 한다.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 침략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다. 교통도, 도로도 발전하지 않았던 이 시대에 부산에서 한양까지 진격이 20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건 일본군의 압도적 공격력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조선의 국방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난 개인적으로 문을 높이 평가하고 무를 낮게 평가했던, 유학은 중시하면서 과학은 경시했던 조선의 유교 사상이 국방력 약화에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사회는 몸을 쓰는 현장직보다 머리를 쓰는 사무직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며 또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걸 나당연합군의 사례에서 충분히 배웠을 터이지만, 급하면 악수를 둔다는 말처럼 다급해진 조선은 명을 불러들이는 악수를 둔다.
1593년,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 교섭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문제를 두고 우리는 배제한 채, 다른 나라끼리 교섭을 하는 이 광경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협정의 그것과 깊은 데자뷔가 일어났다. 이 교섭 기간 중에도 이순신은 일본은 언제든 공격할 것이란 걸 알고 있기에 군량을 넉넉히 비축하고 매일같이 활을 쏘며 훈련했다. 이순신은 마치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 말을 아는 것처럼 꾸준히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 교섭은 1597년까지 약 5년 간 이어졌고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둘 다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명에게 요구한 교섭 조건은 첫째, 명의 황녀를 일왕의 후비로 보낼 것. 둘째,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넘길 것. 셋째, 조선 왕자와 신하 열두 명을 인질로 보낼 것이었고 명이 일본에게 요구한 교섭 조건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조선에서의 철군 등으로 명나라 황제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서로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 교섭이 결렬되면 또다시 전쟁이었다. 결국 심유경과 고니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둘이 짜고, 심유경은 황제에게 일본이 교섭을 수락했다 전했고 고니시는 도요토미에게 명이 교섭 조건을 이행하겠다 거짓 보고를 한다. 하지만 이 거짓은 금세 들통이 나 심유경은 처형되고 고니시는 다시 전쟁의 공으로 갚으란 명을 받고 전쟁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연속인 정유재란(1597년 8월, 정유년에 다시 일어난 전쟁)이다.
하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 1597년 2월, 이순신은 임금의 출정 명령을 어기며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다. 이순신 입장에서 선조의 출정 명령은 아무리 봐도 적의 간계라는 것이 확실했고 명령을 따를 시 조선 수군이 궤멸될 걸 알았기에 이순신은 수군을 지키고 자신이 끌려가 고문당하다 죽는 것을 택한다. 같은 해 4월 만신창이로 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죄인의 신분으로 백의종군을 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찾아와 문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권력이나 돈이 끊기면 사람도 끊기는 게 대부분이지만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을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며 직, 권, 전으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신, 의, 정으로 관계를 맺어 온 이순신의 인품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이순신의 자리를 꿰찬 원균은 권율의 출전 명령에 따르지 않다가 부하들 앞에서 곤장을 맞는 치욕을 겪는다. 이는 마치 회사에서 따로 불러 혼내지 않고 후배들이 있는 곳에서 혼을 내며 자존심까지 짓밟는 옛 상사들의 모습과 같았다. 역시나 원균은 곤장의 아픔보다 치욕에 치를 떨며 1597년 7월 칠천량 전투에서 명예 회복을 다짐했지만 일본 수군에게 궤멸당하고 도망치다 잡혀 처참히 죽는다.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4만 대군을 이끌며 조선을 재침략하였고 비옥한 호남 땅을 먼저 장악하려 했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에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반성문을 보내며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에 명하며 사태를 수습해 주길 부탁한다. 무능해 보이는 선조이기는 하나 아랫사람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할 줄 아는 용기는 나에게 있어 크게 와닿았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는 더더욱 할 줄 모르는 어른들이 수두룩한 이 세상이기에. 결국 이순신은 원균이 궤멸시키고 남긴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상대한다.
이순신은 자신이 가장 앞에 나서는 용기를 보이며 부하들이 물러서지 않도록 독려했다. 1597년 9월, 마침내 명량에서 이순신은 고작 13척의 배로 일본의 133척 배와 싸우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낸다. 좁은 해안과 물살, 바람 등 지형의 특성과 날씨의 흐름을 읽어낸 지략과 부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이순신 리더의 솔선수범은 대포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133대 13의 상황에서 두려움이라는 적에게 먼저 질 수도 있었던 이 전쟁을 이순신이라는 정신이 이기게 만들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며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일본군은 부산으로 집결하며 조선을 떠날 채비를 했으나 순천 왜성을 지키던 고니시는 부산까지 가기에 너무 먼 거리였다. 그렇다고 바다로 도망치기엔 이순신이 버티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 고니시는 경남 사천에 있던 시마즈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시마즈는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들어오며 노량에서 이순신과 전투를 벌였다. 조명연합군은 일본 전선을 200여 척이나 불태웠지만 이순신은 이 전쟁에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한다. 조선 수군은 눈물을 머금고 끝까지 싸웠고 500여 척을 이끌고 왔던 시마즈는 50여 척을 살려 가까스로 도망쳤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종결되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우리 주변에서 리더다운 리더는 보기 힘들 것 같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어쩌면 특별한 리더십이 아닌 리더가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순신이라는 인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순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도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점이다. 나 역시 회사를 그만둔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친했던 사람들에게 연락이 오곤 한다. 지금까진 그 연락이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조직을 떠났음에도,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내가 그들에게 줄 어떤 이익이 없음에도 연락이 온다는 건 명량대첩처럼 기적 같은 일인 것 같다.
"회사에서만 볼 거면 직책 부르고, 회사 나가서도 볼 거면 형이라고 불러."
내가 회사 다닐 때 가깝게 지내던 후배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 말처럼 그때 호형호제 하던 후배들은 여전히 연락이 온다. 누구나 일로 만날 수는 있지만 일이 끝나도 만날 수 있는 건 각자의 능력이다. 이 책을 통해 잊고 있던 리더십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의무'적으로 가 아닌 '의'로 나를 따르게 하고 내가 '무엇'이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닌 내가 '무'가 되더라도 찾게 되는 리더. 그게 바로 이순신이 갖췄던 리더의 진정한 '의''무'가 아닐까?
작가 인스타: @author.ot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