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카나로 Francisco Canaro의 돈이 되는 음악
지난해 BTS의 모 멤버가 무대 의상으로 한복을 입었단 기사를 읽었다. 그 전에도 몇몇 아이돌이 한복을 입고 공항 사진에 찍히는 경우가 있었는데 무대의상은 좀 더 신선한 느낌. BTS가 댄스크루 저스트저크JustJerk처럼 대놓고 한국한국한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그룹은 (아마도?) 아니니까 말이다. 사진을 보니까 (물론 개량 한복이라 그렇지만) 너무 한국뽝 동양미뽝 이런 것은 아니고, 춤추기 아주 편해 보였다. 핏도 예쁘고.. 그래서 나도 하나 살까 하다가 가격보고 내려놨는데. TMI
연예인들은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나오는데, 그럼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수백 장의 사진이 찍히고 기사화되고 품절 대란이 인다. 더군다나 영향력이 전지구적인 아이돌이니까 티셔츠 하나 바지 하나도 다 비즈니스인 셈. 그런 이들이 한복을 입은 것은 꽤나 똑똑한 선택처럼 느껴진다. 개량된 디자인이든 아니든 한국적인, 이국적인, 그래서 색다른 느낌을 주니까 말이다. 이렇게 옷 하나도 비즈니스가 되는 건 원데이투데이 일이 아니다. 1920년대의 탱고 뮤지션들도 같은 선택을 했다. 파리에서 공연하기 위해 남미 원주민 gaucho 옷을 입은 것이다. 그들이 사실 원주민이 아니라 유럽 이주민이란 게 함정이지만.
커다란 모자를 쓰고 하얀색 스카프(?)를 목에 둘러맨 이들은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한 탱고 뮤지션들이다. 원래는 다른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그렇듯이 탱고 오케스트라도 보통은 검은색 정장을 맞춰 입는데 이들의 복장은 아무리 봐도 정장과는 거리가 있다. 살짝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런 옷을 입게 된 이유, 그 직접적인 원인제공자는 프란치스코 카나로 Francisco Canaro에게 있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출신의 프란시스코 카나로. 그의 가족은 아주 찢어지게 가난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를 갔는데, 길에서 구걸을 해야 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 카나로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긴커녕, 기름통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다만 그는 노래하길 좋아하고 음악에 대한 열의가 있었다. 카나로는 기름통과 나무판을 갖고 자기만의 바이올린을 만들어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이웃에게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그는 비센테 그레코 Vicente Greco라는 1세대 반도네오니스트를 만나 음악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탱고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카나로가 음악을 한 목표는 아주 분명했다. 바로 돈과 성공을 거머쥐는 것.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궁핍한 빈민촌에서 힘들게 살았으니 성공이 목표가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음악을 본격적으로 한 1910년대는 탱고가 막 성장하는 시기였으니 수단도 확실히 정한 셈. 하지만 카나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대중 입맛에 맞는 음악을 연주할 것이냐, 아니면 탱고 발전의 템포에 맞춰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냐. 그 사이 벌써 탱고 음악엔 두 개의 갈림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1917년 카를로스 가르델의 "Mi Noche Trieste"를 계기로 탱고 음악은 새 시대의 음악(Guadia Nueva)으로 진화해 나갔다. 연주자들의 전문성이 늘었고, 세련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이를테면 연주자들마다 솔로 파트가 있다거나, 멜로디 위에 멜로디를 얹는다거나, 탱고 테크닉들을 개발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탱고 음악을 그저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늘었지만, 한편으론 춤을 우선으로 하는 대중들은 약간 거부감이 느끼기도 했다. 이때 성공을 위해 카나로가 택한 길은, 기존의 탱고 스타일을 고수하며 연주하는 것이다.
카나로는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통일된 멜로디, 딱딱 떨어지는 리듬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했다. 옛날 탱고를 들으면 느껴지는 "짠짠짠짠" 하는 리듬 말이다. 이를 음악 용어로 마르카토 marcato라고 하는데 음 하나하나를 똑똑 떨어지게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리듬이 계속될 경우 멜로디는 어쩔 수 없이 묻힌다. 카나로가 멜로디를 조금 포기하면서도 이런 스타일을 고수한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이런 리듬이 춤추기엔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 덕인지 카나로는 원하던 대로 대단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뮤지션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며 발전해나간 것과 달리 그는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것도 사실. 그를 다른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처럼 거장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너무 박한 평가라고?
아래 두 가지 버전의 El Choclo를 비교해보면 확실하다.
프란시스코 카나로 버전. 템포가 아주 느리고 마르카토(짠짠짠짠)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54초쯤부터 카나로의 솔로가 있지만 멜로디는 단순하고 비교적 짧다. 그렇게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흔히 얘기하는 전통적 스타일의 탱고다.
같은 해 녹음된 또 다른 El Choclo. 피아니스트 로베르토 피르포(Roberto Firpo)의 오케스트라 버전인데
일단 템포가 훨씬 빠르고, 마르카토 이외의 다른 테크닉들이 들어가 있다. 바이올린의 치차라(Chicara)도 그중 하나. 또 악기들마다 솔로 파트도 있는데, 1:25쯤 시작하는 피아노 솔로 -> 1:55쯤 바이올린 솔로/듀엣 -> 2:30쯤 반도네온 솔로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된다. 솔로 연주는 각자 느낌대로 프레이징이 구현되었다.
피르포의 버전은 후세대에도 계속 영향을 주었다.
프란시스코 카나로의 음악이 전통 스타일이라고 해서 그가 탱고 뮤지션으로서 형편없었단 얘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탱고 음악사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위인인데, 그 이유도 셀 수 없이 많다. 일단 카나로는 거의 처음으로 더블베이스를 탱고 음악에 시도한 인물이다. 그가 최초의 탱고 베이시스트 레오폴드 톰슨 Leopoldo Thompson을 영입했기 때문이다. 영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수백 곡을 녹음해 남겼다. 영화음악 사업은 대부분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개척자이고 선구자인 건 분명하다.
무엇보다 카나로는 탱고 음악사상 최초로 작곡가의 저작권을 얘기했다. 아직 저작권의 개넘이 없던 1918년에 저작권을 위해 싸우고, 이후 1935년, SADAIC (Sociedad Argentina de Autores y Compositores de Musica)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표절 문제는 지금도 하루가 머다 하고 시끄러운데 얼마나 많이 앞서간 것인가. 그 당시 세워진 SADAIC은 아직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작곡/저작권 보호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https://www.sadaic.org.ar/index.php
또 하나의 빠트려선 안 되는 사실 하나. 프란시스코 카나로는 탱고 음악의 시장을 확장했다. 유럽 진출에 성공하고,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리스너 "계층"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1925년 카나로의 오케스트라는 파리로 진출을 했다. 그들은 몽마르트르의 플로리다 Florida라는 곳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기대 이상의 인기를 끌었다. 카나로 이전에도 파리에서 연주를 하던 탱고 연주자가 있었지만 (the Gobbi 등) 카나로 이후로 탱고가 파리 내에서 완전 붐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파리 진출 성공은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탱고 뮤지션들에게도 새로운 시장을 열어준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많은 탱고 오케스트라가 파리에 따라 건너가서 앨범을 내고,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르헨티나 내 정치문제가 심해지면서 연주자들이 파리로 망명을 간 것도, 지금 구스타보 베이터만 Gustavo Beytelmann, 후안 호세 모살리니Juan Jose Mosalini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 마에스트로들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도 다 카나로 파리 진출의 나비효과나 마찬가지다.
파리에서 탱고가 인기를 끈 뒤,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탱고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과거엔 빈민들이나 듣는 음악이라 생각했던 탱고를 부자들도 찾아 듣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물론 카나로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이미 1910년대부터 파리의 아방가르드하고 럭셔리한 스타일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선 유행하고 있었고, 연주자들은 고급진 카바레에서 부자들을 위해 탱고를 연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카나로가 그 기름통에 더 바람을 넣어 불을 붙여준 것은 사실. 어릴 때 기름통 공장에서 일하더니, 어떻게 해야 잘 타오르는지 진작부터 알았던 게다.
한 가지 단점이라고 해야 하나. 탱고 연주자들에게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둘러매 전통 복장을 하게 한 것도 카나로였다. 1925년 이후 파리에서 카나로 오케스트라가 너무나도 인기를 끌자, 파리의 연주자들은 일종의 텃세를 부렸다. 탱고는 진짜 음악도 아니라면서 공연을 못하게 항의한 것이다.
혐탱고(?) 움직임을 해결하기 위해 카나로가 찾은 방법이 바로 가우초 Gaucho 컨셉 잡기. 뮤지션들에게 커다란 모자를 씌우고, 전통옷을 입게 하고, 아스프렐라Asprela라고 코러스 가수처럼 여자들을 무대 위에 세워서 "우린 너네와 다르니 걱정하지 마"라고 안심을 시켜준 것이다. 자신들도 오케스트라이긴 하지만 완전 다른 음악이라고 노선을 달리 한 것. 그런 이국적인 컨셉이 성공해서 파리 뮤지션들과의 충돌도 피하고 계속 인기를 끌 수 있었지만, 그 이후 한참 동안 탱고 뮤지션들이 연주를 하려면 가우초 코스튬을 해야 했다는 슬픈 사실. 그 뮤지션들도 사실 남미 원주민이 아니고 유럽에서 이민 간 사람들인데 말이다.
뮤직 비즈니스를 위해 악기부터 시스템까지 새로운 것들을 도입하고, 해외 진출에다가, 뮤지션들에게 컨셉을 잡아주기까지. 프란시스코 카나로-. 비록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진 못했지만 사업가로선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고, 탱고 음악의 발전에 절대 없어선 안될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를 보면 자꾸만 SM엔터의 이수만 선생이 떠오른다. 그 역시 가수로서 대단히 성공을 이루진 못했지만.. 보아와 동방신기 등을 필두로 일본 및 아시아 진출 성공. 엑소 등에게 우주?컨셉을 잡아주고, 이른바 SM공화국을 세워버린 인물이니 말이다. 끼워 맞추는 거라고 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보면 음악의 역사도 돌고 도는 셈이다.
덧 1.
자꾸 가우초 가우초 하는데... 이게 뭐냐.
가우초 또는 가우슈는 남미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대평원이나 팜파스에 살며 유목생활을 하던 목동이다. 대부분 에스파냐인과 인디언의 혼혈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번성했다. (출처:위키백과)
덧 2.
유명한 탱고곡이자 대단히 연주하기 어려운 Canaro en Paris의 비밀이 여기서 풀린다.
"파리의 카나로"란 뜻의 이 곡은 바로 프란시스코 카나로에 대한 헌정곡인 셈. 1925년, 알렉산드로 스칼피노 Alejandro Scarpino와 후안 칼다레샤 Juan Caldarella가 프란시스코 카나로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 곡을 작곡했다. 뒤에 가사가 붙어지긴 했는데 카나로와 관련된 가사는 아니고 그냥 러브스토리라고.. 어쨌거나 곡은 너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