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eneon Aug 08. 2019

탱고와 재즈가 만났을 때  

Osvaldo Fresedo - Vida mia 

1. 반성과 하소연


내가 처음으로 탱고 공연을 본 것은 재즈 페스티벌에서였다. 워낙 음악 문외한이라 탱고가 재즈 리듬 중 하나인 줄 알았고, 반도네온은 아프리카(!)에서 온 사탄의 악기인 줄 알았다. 그 후에 처음으로 산 탱고 앨범은 파블로 지글러 트리오 Pablo Ziegler Trio 앨범이었는데 충동구매였고, 그마저도 재즈 앨범인 줄로 알았다. 앨범을 듣는 내내 지글러가 라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재즈 피아니스트라 생각했다. 사실은 그 반대 - 재즈 영향을 받은 라틴(탱고) 피아니스트였지만. 


이 곡 때문에 앨범을 샀는데.. 제목의 Lino꽃은 한국말로 개부ㄹ알 꽃이라고... 감성파괴왕이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서울의 시차는 정확히 12시간. 아무리 탱고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르라 해도 지구 반대편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잘 알고 찾아 듣는 건 무리가 있다. 있어봤자 탱고 추는 사람, 피아졸라 듣는 사람, 월드뮤직에 관심 많은 마이너리티, 아니면 나처럼 재즈인 줄 착각하는 무식쟁이들 정도. 그러니 내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만큼 무식했던 게 뭐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도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재즈가 이 땅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비교해보면 탱고의 신세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한 해에도 수차례 재즈라는 이름을 걸고 국제적 페스티벌이 열리고, 힙생힙사하는 사람들은 재즈 역사와 유명 앨범을 기도문처럼 줄줄 외고 다니며, 재즈 레전드에 대한 영화는 소리소문있게 관객을 모은다. 또한 우리는 의도와 상관없이 살면서 한 번씩은 재즈를 듣게 된다. 그게 카페에서 듣는 케니 G이든, 재즈 입문할 때 소개받는 찰리 파커이든, 알아서 찾아 듣는 얀 가바렉이든. "역시 재즈는 색소폰이지"라고 한 번씩 그 힙한 취미를 음미해주며.

그에 비해 탱고는? 누군가 탱고를 찾아 듣는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피아졸라일 것이다. 나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탱고는 싫지만 피아졸라는 괜찮아" 하면서 리베르탱고나 오블리비온을 듣는 걸 많이 봤다. (여러분, 피아졸라도 탱고 뮤지션입니다) 푸글리에세가 어쩌고, 트로일로가 저쩌고 하는 얘기는 탱고를 추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 이건 비난이라기보다 반성이다. 바로 내가 주야장천 피아졸라만 듣던 1인이니까. 



여기까지가 나의 고해성사였다면 탱고에 입문한 지금은? 하소연을 할 차례다.

자고로 옆집애, 엄친딸, 내친구남친, 그리고 옆동네음악과는 비교해선 안 되는 법이라 했거늘. 굳이 마음 상하게 재즈와 탱고를 번갈아 비교하게 된다. 거기엔 나름의 이유도 있다. 탱고와 재즈는 닮은 구석이 참 많아서다. 

일단 두 음악의 기원. 유럽에서 미대륙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토착 음악과 자기네 음악을 짬뽕해서 발전시킨 게 재즈와 탱고, 탱고와 재즈다. 둘 다 춤(스윙과 탱고) 추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 발전했고. 20세기 초중반에 돈을 쓸어 담다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비슷하다. 

물론 저 세 줄에 담기엔 두 장르의 역사가 방대하고, 차이점도 수없이 많다. 아주 대표적으로, 재즈엔 아프리카계 뮤지션이 많은 반면, 탱고 뮤지션은 거의 대부분이 백인 남성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생겨나 비슷하게 발전한 이 두 음악이 지금 리스너/비리스너에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대체 왜일까. 이건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서로 다른 두 집으로 입양 간 쌍둥이가 너무나 다르게 자란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왕국에 입양을 갔고, 또 하나는 인플레이션/독재의 늪으로 입양을 갔으니... 둘 다 막장인건 마찬가지지만. 마치 평일 아침 드라마 줄거리 같군. 지금 두 장르의 가장 큰 공통점을 찾자면, 무슨 장르든 뮤지션들이 먹고살기 힘들다 뿐인 거 같다. 이런.




2. 탱고와 재즈가 만났을 때


두 장르는 역사만 비슷한 것도 아니다. 다른 쌍둥이들처럼, 멀리 떨어져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라고 말하면 많이들 피아졸라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피아졸라가 최초는 아니고 유일했던 것도 아니다. 그 당시, 그러니까 194-50년대엔 탱고계에 그런 붐이 불고 있었다. 아니 뭐 붐까지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는 피아졸라보다 더 오래된 사람에게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바로 레전설 반도네오니스트, 오스발도 프레세도 Osvaldo Fresedo에게로.


1세대 반도네오니스트 Osvaldo Fresedo, 1897-1984

 

오스발도 프레세도는 탱고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한 뮤지션이다. 1912년 작은 카페에서 데뷔한 그는 1980년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탱고에 헌신했다. 그는 1920년대에 훌리오 데 카로 Julio de Caro와 함께 탱고 음악의 신시대 Gaudia Nueva를 이끈 주역이며, 1940년대 이후 아니발 트로일로 Anibal Troilo나 오스발도 푸글리에세Osvaldo Pugliese 같은 신인 뮤지션들을 발굴한 장본인이다. 그런 업적에 비하면 무려 1,250개가 넘는 레코딩 수는 오히려 별것도 아니다 싶어질 정도다. (물론 말이 그렇단 얘기. 대단하십니다, 마에스트로.) 


프레세도는 재즈 뮤지션과 함께 녹음한 최초의(? 적어도 내가 아는) 탱고 뮤지션이기도 하다. 

1930,40년대만 해도 춤추기 좋은 곡들을 연주한 프레세도. 하지만 1950년대 이후로는 그의 음악에 재즈라는 MSG가 가미되었다. 그의 리듬은 댄서들의 스텝을 꼬이거나 멈추게 만들었고, 그 역시 미국에서 연주를 할 때면 본인을 재즈 뮤지션으로 소개했다. 그런 1950년대의 프레세도가 남긴 불후의 명곡, 바로 비다 미아 Vida Mia이다.

1956년, 재즈계의 레전설 트럼펫터 디지 길레스피 Dizzy Gillespie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찾았다. 당시 디지는 남미를 투어 하며 라틴뮤지션들과 공연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프레세도가 활동을 하던 나이트클럽 랑데부 포르테뇨 Rendezvous Porteno에서도 탱고 몇 곡을 연주했다. 그중에 Vida Mia가 포함되어 있다. 


Osvaldo Fresedo - Rendezvous Porteno con Dizzy Gillespie (1956)


원래 Vida Mia는 가사가 있는 곡이다. 원곡은 오스발도 프레세도의 형인 에밀리오 프레세도 Emilio Fresedo가 가사를 붙였고, 로베르토 레이 Roberto Ray란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디지와 함께한 버전은 연주곡이다. 대신 디지는 가사가 나올 부분에서 트럼펫 솔로를 연주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 역사적인 만남은 녹음되었고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탱고와 재즈, 재즈와 탱고 두 장르의 최고 뮤지션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Vida Mia가 수록된 두 개의 앨범 표지

왼쪽은 아르헨티나에서 발매된 프레세도의 앨범. 디지 길래스피가 참여한 4곡 이외에도 15여 곡의 탱고가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은 2000년도(?)에 미국에서 발매된 디지 길래스피 앨범으로, 그가 남미 투어 중에 연주한 삼바, 탱고 등 여러 장르의 곡을 담고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 앨범 다 트랙 말미에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그들의 음성은 잘 알아듣기도 힘들지만, 색다른 시도를 한 두 마에스트로의 소리를 듣는 건 신비롭기까지 하다. 노래든 음성이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3. 한번 더, Vida Mia


탱고가 재즈 리듬 중 하나인 줄 알고 설치던 때가 겨우 4, 5년 전이다. 그러니 이런 애송이 주제에 탱고 역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 자체가 시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알게 뭐야, 이건 나에게 보속 같은 일이다. 

"탱고의 왕이시여, 제가 이러저러해서 탱고를 오해하고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마에스트로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이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사하여 주시옵소서." 

"어쩌고 저쩌고, 보속으로 탱고 역사에 대해 쓰면서 너도 공부하고 탱고 부흥에 힘쓰도록 하여라." 


보는 사람 없는 블로그에 탱고의 모든 걸 쓴다고 해서 탱고가 갑자기 1930년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급으로 인기를 끌게 될 일은 없다. 그건 내가 탱고 애송이가 아닌 학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애초에 탱고에 대한 수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알게 뭐야, 이 짓을 하는 건 나에게 운명 같은 일, 숙명 같은 일, 나의 Vida Mia다.


Vida Mia는 우리말로 "나의 인생"이란 뜻인데, 너무나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가사를 갖고 있다. 

Vida mía, lejos mas te quiero. 
나의 인생이여,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
Vida mía, piensa en mi regreso.
나의 인생이여, 내게 돌아오길 바랍니다. 
....
Sos mi vida y quisiera llevarte a mi lado prendida y así ahogar mi soledad.
당신은 나의 삶. 당신을 내 곁에 (핀처럼 고정시켜) 두고 내 외로움을 마르게 하고 싶어요


 1933년 녹음된 버전. 2분부터 가사 부르기 시작


Vida Mia가 나의 인생, 나의 삶으로 직역되지만, 전체 콘텍스트 안에서 의역하자면 '나의 연인'쯤 되는 거 같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이 가사를 '나의 음악, 나의 운명, 나의 탱고'라고 부르고 싶다. 

내 곁에 두고, 계속 사랑하고 싶은 음악. 내게 행복을 가져다줄 탱고. 발번역 실력이라 오해하고 듣는 거일 수도 있지만, 마음만은 진심이다. 더 욕심을 내자면, 탱고가 다른 이들에게도 Vida Mia가 되면 좋겠다. 재즈의 일부가 아니라, 클래식의 일부가 아니라, 피아졸라가 아니라- 탱고 그 자체가. 이 아름답고 다채로운 멜로디와 리듬, 가사가 계속 불리고, 얘기되고, 사랑받길. 나로부터, 그리고 당신들로부터. 너무 과한 욕심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덧 1. 

위에 (재즈-탱고의 콜라보를 한 건) 피아졸라가 최초가 아니라 했지만, Vida Mia를 녹음했을 당시 프레세도가 이미 피아졸라의 영향을 받았던 거일 수도 있다. 당시는 젊은 피아졸라가 한창 (욕먹어가며) 활동하던 시기이니까.

그럼에도 굳이 프레세도를 얘기한 것은 1세대 반도네오니스트에 대한 경의이자 상식에 대한 반항이랄까. 물론 나부터가 피아졸라만 듣던 사람이지만, 피아졸라=탱고를 부수고 다시 탄생시킨 인물, 킹왕짱, 최고로 여겨지는 게 싫다. 물론 피아졸라가 킹왕짱 대단하긴 하지만, 그의 음악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생겨난 건 아니다. 그래서 나 혼자만의 다짐이라면, 피아졸라 얘기는 최대한 미루는 것이다. 




덧 2. 

Vida Mia를 (공식적으로) 처음 연주한 재즈 뮤지션은 디지 길래스피이지만, 이 곡이 재즈로 연주된 게 단 한 번 뿐이었던 건 아니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67년에 녹음된 이 버전.


이게 첫 녹음 버전인진 모르겠다만.... 

호라시오 살강 Horacio Salgan은 흔히 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탱고 피아니스트다. (재미있는 건, 그가 거의 유일한 아프리카계 탱고 뮤지션이란 사실이다. 물론 '유색'이라고 치기엔 많이 '하얗'지만) 그는 우발도 데 리오 Ubaldo de Lio라는 기타리스트와 여러 장의 듀오 앨범을 냈는데, 그중엔 Vida Mia도 수록되어 있다. 프레세도의 원곡 멜로디가 많이 살아있긴 하지만, 재즈 느낌 역시 많이 가미되었다.




덧 3.

탱고 뮤지션 중에 Osvaldo가 얼마나 많은지. 이제 시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00년 전 아르헨티나에도 이수만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