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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Feb 29. 2020

데카로 스쿨을 아시나요

훌리오 데 카로 Julio de Caro가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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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수저 들고 태어난 뮤지션


훌리오 데 카로Julio de Caro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훌리오의 아버지 호세 데 카로Jose de Caro는 이탈리아 밀라노 음대의 교수였다. 호세 데 카로는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간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 텔모에 음대를 짓고 본인이 교장으로 지냈다. 데 카로의 집은 언제나 뮤지션들로 붐볐다.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 중에는 알베르토 윌리엄스Alberto Williams 같은 유명 작곡가도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훌리오는 부와 명예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당시 탱고 뮤지션들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탱고는 가난한 이민자의 음악이었고, 뮤지션 중에는 악보를 못 읽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 시기에 활동한 또 다른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치스코 카나로Francisco Canaro의 경우.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바이올린을 하고 싶지만, 악기가 없어서, 깡통으로 직접 만들었단 얘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반도네오니스트 오스발도 프레세도Osvaldo Fresedo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그는 그럭저럭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다. 하지만 음악 교육을 받을 만큼 부유했던 것은 아니다. 거의 독학으로 악기를 배워서 뮤지션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갖고 태어나는 건 분명 큰 복이다. 금수저를 들고 태어난 거다. 과연 훌리오 데 카로와 두 형제, 프란치스코Francisco de Caro, 에밀리오Emilio de Caro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훌리오 역시 처음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8살 때 제 형제 프란시스코와 악기를 바꿔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훌리오는 클래식 연주자로서 형제들과 함께 유명 무대에 올랐고, 13살 때는 아버지를 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 내다 던진 금수저


훌리오 데 카로가 처음 탱고에 눈을 뜬 것은 17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로베르토 피르포Roberto Firpo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다. 피르포 역시 어린 소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La cumparisita"를 연주하게 했다. 관객은 그의 연주에 환호했다. 그런데 관객보다 더 감동을 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반도네오니스트 에두아르도 아롤라스Eduardo Arolas다. 그는 즉시 훌리오에게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라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훌리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훌리오 데 카로는 명망 있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음악교수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의사가 되길 바랐다. 그런데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도 못마땅해할 판에, '딴따라' 탱고 뮤지션이 되겠다고 하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서 쫓겨날 만한 일임을 알고, 아롤라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 날, 훌리오 데 카로는 바로 마음을 바꾸고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장차 탱고의 역사를 바꾸게 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훌리오의 아버지는 그 결정에 반대했다. 훌리오 데 카로는 집안에서 쫓겨났다. 자신이 타고 난 금수저를 내다 버린 결과였다. 



3. 탱고, 듣는 음악으로 발돋움


1921년. 훌리오 데 카로는 카니발 공연을 위해 자신만의 팀을 꾸렸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 에밀리오와 프란시스코를 불러들였고, 당시 최고로 여겨지던 다른 뮤지션들도 불러 모았다. 그렇게 하여 훌리오 데 카로의 섹스텟 - 피아노에 프란치스코 데 카로, 바이올린에 훌리오 데 카로와 에밀리오 데 카로, 반도네온에 페드로 마피아PedroMaffia와 루이스 페트루첼리Luis Petrucelli, 그리고 베이스에 레오폴드 톰슨Leofoldo Thompson-이 결성되었다.

가운데가 훌리오 데 카로. 나머진 잘 모름..

생 마틴 극장에서 연주를 시작한 훌리오 데 카로와 멤버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춤추길 멈추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춤을 추기 위해 카니발에 간 사람들이, 춤추길 마다하고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훌리오 데 카로는 '듣는 음악으로써의 탱고'에 비전을 봤다고 한다.

카니발 이후, 훌리오는 탱고의 음악적 발전을 위해 더더욱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1923년, 자신의 섹스텟 멤버를 재정비하고 스타일을 구축해나갔다. 이때 그의 팀이 만든 탱고의 스타일은 그대로 탱고 장르 자체의 특징이 되었다. 그 스타일을 만들기까지, 어린 시절 배운 클래식 음악 이론이 도움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탱고에 대한 훌리오 데 카로와 멤버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p.139
I desired for tango to be the best in terms of music, colorful and with the right interpretation, fraseos, and octaves in the bandoneones, violin and piano solos for each piece; in the end, something very special, that ennobles tango, respecting the authenticity and creation of the author.
                     -Link, Kacey, <Tracing Tangueros>, Oxford University Press



4. 전에 없던 탱고


훌리오 데 카로의 탱고는 혁신 그 자체였다. 복잡한 하모니와 카운터 멜로디, 싱코페이션 등 클래식 음악 지식을 접목해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음악에 유머를 넣기도 했다. 가령 곡 중간에 휘파람 소리나 웃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를 넣기도 했다. 이는 클래식 음악에서 기인한 게 아니다. 탱고만의 독창적인 소리를 개발한 것이다. 

 

Julio de Caro - El Monito (1928)


위의 곡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다른 악기의 특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지 단번에 와 닿는다. 악기마다 메인 멜로디이든, 카운터 멜로디이든, 리듬이든 다른 요소들을 연주하고 있지만 너무나 조화롭게 짜여있다.


나는 이중 특히 리듬 파트를 한 번 더 언급하고 싶다. 훌리오 데 카로는 탱고에 타악기 소리를 넣은 최초의 사람 중 하나다. 다른 라틴음악과 다르게, 탱고 앙상블에 드럼/퍼커션이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탱고 뮤지션은 무슨 악기를 연주하든 퍼커션의 효과를 낸다. 바이올린으로는 벌레 울음소리 같은 사운드를 만들고(치차라 chicharra), 콘트라베이스 역시 즤익 즤익 소리를 내며 (칸젱게canyengue) 싱코페이션을 더 강조한다. 바이올린의 치차라는 위의 El Monito에서 처음 쓰였으며, 칸젱게는 베이시스트 레오포드 톰슨이 훌리오 데 카로 오케스트라에 있을 때 처음 시도했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 유머 요소가 들어 있는 것도 곡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휘파람 소리는 약 15초부터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1분 50초쯤에는 남자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놀라운 건 이런 요소가 곡을 망치기는커녕 더 풍성하게 한다는 사실. 훌리오 데 카로를 새 시대 Guardia Nueva의 아버지라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4. 연주는 노래하듯이


이런 식으로 훌리오 데 카로의 위대함을 서술하다간 책 한 권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이 글에선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언급하고 끝내고자 한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말을 빌자면, 훌리오 데 카로는 탱고의 스윙을 발명했다. (이전 글 참조)

탱고 뮤지션들은 멜로디를 악보 그대로 연주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4분의 4박자 곡에 8분 음표가 8개 연달아 있더라도, 다 같은 길이로 연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변주를 주어 연주했으면, 다음 마디에선 그 방식을 반복하지 않고 또 다른 변주로 연주한다. 이런 프레이징은 훌리오 데 카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탱고는 원래 춤곡이었다. 훌리오 데 카로 이전까지만 해도, 뮤지션들은 딱딱 떨어지는 정박으로 연주를 했다. 댄서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데 카로는 듣는 음악으로서의 탱고를 추구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정박을 벗어났다. 마치 가수가 노래하는 것처럼, 데 카로는 바이올린으로 노래를 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바이올린 버전의 카를로스 가르델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연주 스타일은 탱고 뮤지션의 표준이 되었다. 뮤지션들은 비로소 노래하듯이 연주하게 되었다.

Julio de Caro Orquestra - Flores Negros 

이 곡은 피아니스트이자 훌리오 데 카로의 형제인 프란치스코 데 카로가 작곡을 했다. 스윙이 느껴지는 훌리오 데 카로의 바이올린 솔로가 매우 인상적이다. 데 카로 형제들은 같이 활동을 할 만큼 우애가 아주 깊었다. 당연하지만, 다른 두 형제의 음악적 재능 역시 아주 뛰어났다. 프란치스코가 쓴 이 곡은 특히 지금까지 가장 사랑받는 탱고 스탠더드 중에 하나다.

프란치스코가 죽고 몇 년 뒤 훌리오도 세상을 떠났으며, 둘은 같은 묘지에 묻혔다. 훌리오는 언제나 자신의 형제들과 영혼을 나눈 사이라 말했는데. 한 자리에 묻히고, 지금 저승에서도 같이 연주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p.405
“We are, not only brothers of blood, but also of spirit; we are committed to the dignity of the native music [tango music], complementing each other wonderfully. Neither one of us could live without the other.”
                    - De Caro, <El tango en mis recuerdos>




5. 데 카로 스쿨


탱고 뮤지션이나 학자들은 '데카로스쿨'이란 말을 곧잘 쓴다. 훌리오 데 카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전 글에도 말했지만, 좋든 싫든 인지하든 못하든, 탱고를 연주하는 모두는 데 카로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훌리오 데 카로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덕에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고 탱고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평생 그의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지 못했다. 그의 형제들, 에밀리오와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를 잃으면서까지 선택한 탱고. 그 덕에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까.

 


Julio de Caro Orquestra - Loca Bohemia

훌리오 데 카로의 모든 유산이 다 담긴 곡 중 하나. 템포를 지키되 스윙을 살린다. 악기들이 조화를 이룬다. 



Astor Piazzolla orquestra - Loca Bohemia (?)

이 곡을 들어도 피아졸라가 얼마나 훌리오 데 카로의 유산을 이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데카로가 만든 스타일이 그대로 다 녹아있다. 피아졸라가 탱고를 부쉈다는 말은 그래서 말이 안 되는 것.. 




덧1.

훌리오 데 카로는 굉장히 특이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트럼펫 바이올린이라고, 트럼펫의 호른이 끝에 달린 바이올린이었다. 당시는 마이크가 없었고, 일반 바이올린은 사운드가 너무 작았기 때문. 당연히 음색은 일반 바이올린보다 덜 아름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테크닉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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