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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Aug 02. 2021

반도네온이라는 서정성

반도네온은 왜 탱고의 꼬라손일까

1. 서정시와 음악


서정시라는 단어는 영어 lyric poetry를 번역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lyric poetry는 근대에 와서 주요한 시의 장르로 부상했다. 서정시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일인칭 화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자연물에 투영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 배웠다. 개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근대에 서정시가 부상한 것은 순리였던 셈이다. 물론 이 투박하고 서툰 정의에 모든 서정시를 끼워 맞출 수는 없는 줄로 안다. 문화권마다, 시인마다, 그리고 시마다의 서정시적 특징은 다르다. 김소월 <진달래꽃>의 서정성을 아직도 학자들이 논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Lyric poetry라고 하여 반드시 서정시가 노래란 법은 없다. 그러나 대중가요의 가사가 일종의 시문학이긴 하다. 그러한 전제하에, "달"은 한국의 서정적 가요에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메타포다. 달은 마치 사람처럼 불린다. 짝사랑하는 상대처럼 “매일 밤을 함께해도 다가갈 수 없어” 화자를 더 슬프게 하고,  (샤이니, <너와 나의 거리>) 혹은 친구처럼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으로 위로를 한다. (보아, <넘버원>) 그런가 하면 김건모가 노래한 <서울의 달>의 달은 가장 대표적으로 시적 화자가 투영된 달이 아닐까. 처량하게 텅 빈 가슴을 안고 사는 그 마음, 동병상련을 느끼게 하니까.


김건모 - 서울의 달
오늘 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워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2. 반도네온이라는 메타포


한국 가요의 달과 같은 존재가 아르헨티나 탱고에도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한국의 달보다 더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메타포 - 바로 반도네온이다. 탱고의 심장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악기는 탱고 가사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화자와 함께하는 친구로, 가난을 함께한 친구로, 반도네온은 수도 없이 불리고 또 울린다. 가사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제목에서도 사람처럼 불리긴 마찬가지다. “얘, 반도네온아 Che Bandoneon”라든지, 아니면 “잘 자라 반도네온 Buenas noches, che bandoneon”이라든지. 그런 예시는 찾고 찾아도 끝이 없다.


L.Federico & S.Rinaldi - Che Bandoneon
얘 반도네온아,
 네 음악의 영혼이 다른 이들의 고통에 연민을 가져다준단다
그리고 내가 졸린 너를 깨워 연주할 때,
그 소리는 가장 고통받는 마음에 가까이 가닿는단다 


이런 반도네온의 위상은 다른 음악 장르와 비교를 해보더라도 굉장히 독특하게 보인다. 가령 서양 클래식 음악에도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 피아노 협주곡, 첼로 앙상블 뭐 이런 식으로 특정 악기를 위해 지어진 곡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각 악기를 의인화하여, 혼이 담긴 존재처럼 여기며 부른 건 아니다. 

왜 그럴까. 탱고가 반도네온만으로 연주하는 건 아닌데. 기타, 피아노, 바이올린 등등 - 얘야, 하고 다정히 부를 악기는 줄을 섰는데. 특히나 바이올린. 바이올린은 탱고를 탄생에 기여한 악기이며, 한 번도 탱고 앙상블에서 제외된 적 없는 악기다. (탱고는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 하프 등의 악기로부터 탄생했으며, 플루트와 기타, 하프 등은 피아노와 반도네온에 의해 대체되어 전통 오케스트라나 섹스텟 앙상블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Che Violin이라는 곡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네온이 탱고에서 특별한 이유- 그를 수학 공식처럼 증명할 수야 없겠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가늠해볼 수는 있다. 일단 악기의 음색. 금속이 떨리며 내는 악기의 소리는 마치 울음소리 같다. 음의 높낮이/연주 방식에 따라 표효하는 울음이든 흐느끼는 울음이든. 반도네온의 음색은 멜랑꼴리란 단어가 잘 어울린다. 아니, 너무 주관적인 생각인가?

두 번째는 바람소리. 반도네온의 바람통을 밀어 넣거나 잡아당기며 소리를 낸다. 악기를 잘 연주하려면 보이지 않는 버튼을 잘 누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바람통을 제대로 컨트롤하는 게 중요하다. 가끔 공기가 모자라 (혹은 음악적 판단으로) 악기를 닫고 다시 열며 연주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반도네온은 숨소리를 낸다. 그래서 반도네온은 윈드 악기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클라리넷이나 트럼펫 등 다른 윈드 악기처럼 사람의 숨소리를 확대해 내는 것과 달리, 반도네온은 제 자신의 숨소리를 낸다.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니, 사람처럼 느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서정적 메타포로 불리는 것일지도. 



3. 장르의 한계를 넘어


한 악기가 장르를 상징한다는 게 독일지 약일지. 반도네온은 쉽게 "네 대의 키보드가 달린 바람상자"라고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여느 키보드 악기가 그러하듯, 반도네온으로도 웬만한 장르의 음악은 다 소화가 가능하다. 바흐를 필두로 클래식을 연주하는 경우는 상당수고, 재즈와 라틴음악, 가요, 락까지. 연주자들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반도네온 = 탱고라는 공식이 지배적이며, 탱고를 연주한 적 없는 반도네온 연주자 역시 찾기 힘들다. 이게 독이냐 약이냐 -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반도네온의 저변을 확대하는 건 연주자의 몫이고, 탱고와 포르테뇨 문화의 꼬라손을 반도네온이 갖고 가는 건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가령 두독의 슬픈 곡조가 알마니안 음악의, 그리고 그 문화의 영혼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가난한 연주자가 평생 자신과 동고동락한 악기를 동반자로 여기며 말을 거는 탱고의 가사를 나는 사랑한다. 아마도 여기엔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사람의 자아보다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자아가 더 크게 반응한 것 같다. 뭐 딱히 두 개의 자아를 구분 지을 일은 아니지만. 반도네온을 노래하는 수많은 탱고 중 가장 궁극의 서정성을 가진 곡, "내 반도네온과 나 Mi Bandoneon y Yo"로 게으르게 쓴 이 글을 마친다.


Ruben Juarez - Mi Bandoneon y Yo
내 반도네온과 나, 우리는 함께 자랐지. 아마도 가난으로 연결되어서
많은 날 우리는 기쁨으로 웃고, 또 다른 많은 날 슬픔 속에 울었지
나는 이 바람통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어, 손에서 손으로
내가 그 늙은 여자에게 말했을 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가 내게 답을 할 때는 마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내게 답하는 거 같았어
그래 내 형제여, 항상 그래 왔듯, 죽는 날까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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