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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Jul 14. 2020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에두아르도 아롤라스 Eduardo Arolas 

1.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또꽤닮았소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비뚤게 쓴 모자, 갈매기 날개처럼 휘어진 눈썹, 깊고 검은 눈, 창백한 얼굴, 붉은 입술, 그리고 연신 연기를 뿜어내는 기다란 담배 파이프. 이 그림은 20세기 초의 화가 구본웅이 그린 <친구의 초상>으로, 작가 이상을 모델을 삼아 그렸다. 작품 속 이상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까리하다'. 

이상은 한국 문단의 "F4" (황순원, 윤동주, 백석, 임화)와 같은 정석미남은 아니지만, 개성과 매력 있는 외모로 팬심을 자극한다. 구본웅은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블라맹크의 <파이프를 문 남자>에 대한 오마주로 이 <친구의 초상>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상의 초상을 보면 블라맹크의 작품 말고 다른 인물이 생각난다. 그건 바로 탱고 뮤지션 에두아르도 아롤라스Eduardo Arolas다.


대충 걸쳐 쓴 페도라와 날렵하게 올라간 눈썹, 흰 피부, 잘 다듬은 콧수염, 보타이에 정장, 그리고 예의 그 파이프 담배까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모습과 어딘지 많이 닮은 이 남자가 바로 에두아르도 아롤라스다. 

아롤라스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탱고 아티스트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롤라스와 이상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은 전혀 없다. 아롤라스는 189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고, 이상은 18년 뒤인 1910년에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뭐, 아롤라스가 프랑스 이민자 가정 출신이니, '블라맹크' 가 접점이라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 비슷한 스타일에 한해서 말이다. 

하지만 굳이 이상과 아롤라스를 엮어 얘기한 데엔 그 스타일 말고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시대를 한참 앞서간 천재였고, 천재의 숙명과도 같은 불우하고 격정적인 인생을 살았으며, 모국을 떠난 타지에서 결핵으로 요절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지구의 끝과 끝에 살다 간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들"인 셈이다. 





2.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에두아르도 아롤라스. 그는 탱고의 주춧돌과 같은 인물 중 하나다. 반도네오니스트, 천재 작곡가, 밴드 리더 등 그를 설명하는 말은 많지만, 그중 대표를 고르자면 단언 El Tigre del Bandoneón, 반도네온의 호랑이다. 아롤라스는 16살 때 반도네온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악기는 6살 때부터 연주한 기타였다고. 피아졸라나 트로일로 같은 유명 반도네온 연주자들이 10살 이전에 반도네온을 시작한 것에 비하면, 아롤라스의 시작은 한참 늦었다. 심지어 아롤라스가 당시에 배운 반도네온은 버튼이 42개뿐인 초보자용이었다. (일반적으로 반도네온은 왼편에 33개, 오른편에 38개 - 총 71개의 버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핸디캡조차 될 수 없는 게, 아롤라스는 단 3년 만에 71개 버튼 반도네온을 갖고 무대에 오를 정도로 폭풍 성장을 했다. 프란치스코 카나로 같은 당대 거장들은 아롤라스에게 자신의 밴드에서 함께 하자며 제의를 했고, 아롤라스는 최고 뮤지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도네오니스트로 성장했다. 그리고 반도네온의 호랑이로 불리게 되었다.

아롤라스의 연주가 뭐가 그리 특별했을까. 뭐가 그리 남달라서 호랑이라고까지 불렸을까. 그는 자신의 감정을 담아 연주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감정을 반도네온에 담아 연주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아롤라스가 활동하던 시기, 대부분의 연주자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거나 아마추어 연주자였다. 더군다나 반도네온이 유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연주법은 아주 단순했다. 멜로디 단선율을 연주하거나, 코드 몇 개를 짠짠짠 연주하는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아롤라스는 멜로디를 프레이징하는 다양한 방식을 발명했다. 옥타브 프레이징, 3도 화음 프레이징으로 멜로디를 풍성하게 했다. 그리고 베이스음을 누르며 거칠게 연주하거나, 카를로스 가르델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게 연주하는 등 멜로디에 감정의 색을 입혔다. 이 모든 게 전에 없던 테크닉으로써, 반도네온은 물론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익혀야 하는 필수요소들이 되었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반도네온의 호랑이는 죽어서 탱고의 뼈대를 남긴 것이다.



3. 절망이 기교를 낳고


이토록 대단한 반도네오니스트, 에두아르도 아롤라스. 하지만 그를 단순히 천재 연주자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모욕과 같다. 아롤라스는 탱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곡은 무려 120여 곡이 되는데, 그중에는 탱고의 스탠더드 곡들이 수두룩하다. La Cachila, El marne, Comme il faut, Derecho viejo 같은 곡들- 탱고를 듣거나 연주한다면 한 번쯤은 마주쳤을 스테디셀러다. 과거 황금기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물론, 지금 시대의 연주자들도 아롤라스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

작곡가 아롤라스가 대단한 이유,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일단 그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기도 전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곡 <Una noche de garufa>는 1909년 완성되었는데, 당시 그는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17세 소년이었다. 당연히 어설픈 느낌이 나지만, 아롤라스의 스타일이라 하는 것들 - 곡의 구성 방식, 분위기 등은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롤라스는 이 곡을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1912년 녹음을 했는데, 그 앨범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엄청나게 히트를 치고 아롤라스가 계속 작곡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Qu5QMnuoIA

 Eduardo Arolas 오케스트라 버전 (1912)

위의 곡은 아롤라스가 녹음한 오리지널 버전. 아래는 그 후 30년 지난 뒤에 연주된 리카르도 탄투리 오케스트라 버전. 탄투리는 황금기 시대에 피아니스트이자 오케스트라 리더로 오래 활동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ObnLSRxk4

Ricardo Tanturi 오케스트라 버전 (1941)



아마추어 뮤지션이던 아롤라스는 1913년부터 약 4년간 화성학 등 음악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곡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몇 곡 남아있는 걸 들어보면 확실히 더 성숙한 느낌을 준다. 그중 하나는 탱고의 유명 스탠더드이기도 한 <Derecho Viejo>. 


https://www.youtube.com/watch?v=m_u_YQKhGzA  

Francisco Pracánico - Derecho Viejo (1927)

아롤라스가 이 곡을 녹음했는지는 모르겠다. 내 검색망에 잡히는 가장 오래된 버전은 1927년 녹음된 위의 곡인데, 1927년은 이미 아롤라스가 세상을 떠난 뒤다. 대신 훌리오 데 카로, 카를로스 디 살리,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등 유명한 뮤지션들이 한 번씩은 이 곡을 녹음했다. 그중에는 아스토르 피아졸라도 있다. 1959년 오케스트라 버전 녹음으로, 일렉기타가 들어간 게 특징이라면 특징. 중간에 반도네온의 카운터 멜로디는 피아졸라 곡 <Melancolico Buenos Aires>가 떠오르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DrtZSpWXO7s&t=7s

Arstor Piazzolla Orquesta - Derecho Viejo (1959)


이제 이쯤에서 아롤라스가 대단한 작곡가인 두 번째 이유를 얘기해야겠다. 그의 대부분의 히트곡은 모두 1917년부터 1924년까지, 단 7년 사이에 작곡된 것들이다. 그 시기 아롤라스의 음악은 더욱 격정적이고, 멜랑꼴리 하고, 슬퍼진 분위기를 띄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특징은 그의 절망에서 기인했다. 아롤라스가 투어를 위해 유럽에 가있는 동안, 아롤라스의 연인이 그의 형과 눈이 맞아 아롤라스를 떠나가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후 아롤라스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등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작곡한 곡들은 구슬픈 멜로디와 격정적인 리듬과 같은 확고한 스타일을 갖게 되었고, 이는 탱고의 장르적 특징이 되었다. 특유의 멜랑꼴리함 때문에 탱고 반도네온을 사랑하는 나를 포함해, 탱고를 듣는 우리 모두는 아롤라스의 절망에 크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MW664iSlKs

Eduardo Arolas - Comme il Faut (1918)

아롤라스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이자 실연의 슬픔이 담긴 곡, <Comme il Faut>.  참고 듣기 힘든 음질임에도 이 버전을 올리는 것은 아롤라스에 대한 경의의 뜻이자, 아래 버전과 비교를 위해서다. 파블로 에스티가리바 Pablo Estigarribia, 빅토 라바셴Victor Lavallen, 오라시오 카바르코Horacio Cabarco - 현존하는 최고의 탱고 트리오가 이 곡을 연주해 앨범에 담았다. 위의 버전과 100년 하고도 1년 만에 말이다. 테크닉과 퀄리티는 분명 다르지만, 원곡의 감성은 그대로 남아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7Grz1ianPY

Comme il faut by trio Lavallen / Estigarribia / Cabarcos (2019)



4.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 나락으로 떨어진 천재는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했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더욱 심해졌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작곡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절망에게 패배한 아롤라스는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곳,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의 한 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1924년 9월 29일, 겨우 32세의 나이로 말이다. 

아롤라스의 공식 사인은 결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아롤라스가 슬픔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 마치 작가 이상이 결핵으로 인해 죽은 걸 두고 박태원이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천재의 숙명이라도 되듯 너무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롤라스. 그가 오래 살아 곡을 계속 썼다면 어땠을까. 걷던 걸음을 멈추고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하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절망 속에서도 조금은 희망을 가졌더라면.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아쉬운 마음에 이 부질없는 짓을 더해본다.





덧1.

아롤라스는 그림에도 재능이 많아서 일러스트레이터, 카투니스트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앨범 표지 그림 역시 본인이 직접 그린 것. 마침 이상 역시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평행이론 무엇?




덧2.

글의 소제목은 모두 이상의 작품에서 따왔다.


1.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또꽤닮았소

이상 <거울>에 나오는 시구이다.


2.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이상이 쓴 <오감도 작가의 말>의 일부다. 이상은 <오감도>를 신문에 연재하다가 독자들의 항의로 인해 중단해야 했는데, 그 이후 섭섭한 마음을 이 <작가의 말>에 담았다. 


3. 절망이 기교를 낳고

이상이 구인회 동인지 발간을 기념하여 쓴 <어느 시대에도>라는 글의 일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라는 문장에서 잘라 썼다. 


4.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이상의 소설 <날개> 마지막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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