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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사탕 Aug 07. 2023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틈틈이 자투리 금액으로 모아 왔던 소액 적금이 만기가 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모바일 또는 스마트뱅킹이 없었을 때에는 담당 은행직원이 친히 전화를 해주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는데 이제는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알림이 뜬다. 예전과 달리 인간미 넘치는 사람 소리는 없다. 그러나 핸드폰 상단에 떠 있는 '축하합니다'는 여전히 반갑게 느껴진다. 그 마음 한편에서는 기계의 메마름을 어쩔 수 없다고 다독이면서 말이다.


신혼 가전으로 샀던 냉장고가 어느덧 10년을 채웠다.

결혼 3년 차 때쯤부터 냉장실에서 물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5년 차부터는 1~2년에 한 번씩 고장이 나서 AS를 여러 번 받았던 기특하고 안쓰러운 아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년에 이사 갈 때 나도 한 번 양쪽으로 여닫히는 신형 냉장고를 써보고 싶었다. 


들어오는 돈은 월급뿐인데, 나가는 돈은 점차 아이들 성장과 함께 자라고 있으니 매달 조금씩 아껴서 모으고 있던 적금이었다.


AI의 푸석거리는 알림이면 어떠랴.

푼돈이 여전히 티끌같이 느껴져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이 만기 알람 하나로 칭찬받는 느낌이어서 좋았다. 서둘러 해지와 함께 다양한 예금 쇼핑을 시작했다. 시간이 걸려 0.1프로의 이자를 더 받는 기특한 놈을 골랐다. 최근 몇 달 전 새로 계좌를 만든 은행을 통해 진행하고자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이체를 진행했다. 그리고 아무 의심 없이 한데 모인 나의 귀한 새끼를 맡기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겨 버렸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1/5회)'


"어라? 패스워드가 뭐였지?"


새로운 은행과 안면을 튼 지 고작 3개월 밖에 안되었는데...

물론 그 이후로 한 번도 비밀번호를 사용하지 않았기는 했는데...


"그걸 고새 까먹는다고?!!!"


나 이제 고작 30대인걸! 낼 모래 40대를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창창한데!

내가 스스로의 두뇌를 자만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연하게도 각 계좌마다 비밀번호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은 상식이고, 앱을 통해서는 주로 패턴을 사용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두뇌가 새하얗게 무결점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당황스럽게 다가왔다.


'비밀번호 오류(5회)로 거래 제한 되었습니다'


결국 오기와 함께한 재시도는 객기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4번만 하고 다음날 다시 도전해 볼걸 그랬다는 의미 없는 후회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앉아서 작은 핸드폰과 손가락으로 해결하려 했더니 인간미 없는 AI는 가차 없이 나를 은행 방문으로 안내한다.


편리함으로 가득 찬 모바일 세상. 

그 단맛에 빠져 비밀번호조차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로 아둔해져 버린 나 자신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최근 은행들이 영업점을 줄인다고 하던데 덕분에 내가 지내는 직장, 집 근처 모두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가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까맣게 잊어버린 비밀번호는 나의 몸을 고생시키게 되었으나 그나마 억지로 교훈 하나를 만들어서 위안 삼아 본다.


편리함에 안주하여 더 많은 것을 잊지 말라는 경고쯤으로 말이다.

TV가 바보상자 라는데, 핸드폰은 작은 바보상자였구나. 


내 손 안의 세상이라고 추앙받는 핸드폰이 이렇게 조금씩 나를 작은 공간으로 가두어 두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의 세상은 손바닥 안이 아닌 더 넓은 곳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의 패스워드를 떠나 더 많은 것들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주변을 쳐다보아야겠다.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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