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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라 Jul 06. 2022

#노키즈존

선량한 차별주의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요새 많이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한다. 어느 한 세팅 중에 일명 '또라이', 무개념의 매너 없는 사람이나, 지극한 개인주의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바로 내가 그 또라이 일 수 도 있다는 섬뜩한 이야기.  


각 서비스를 요하는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분들은 특히나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결국 이런 분들을 만나지 않기 힘들다. 부모님은 10년이 넘게 숯과 불을 쓰는 고깃집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간혹 일을 돕다 보면 역시나 대단히 불쾌한 일들이 발생한다. 은행과 피부과에서 일한 지인들은 비 오는 날에 특히 그러한 빌런들이 나타난다 회자한다. 장마철에 사람들은 잘 다니지 않는데, 굳이 그 비를 뚫고 잔뜩 화가 난 끝판왕들의 재림 한 느낌이 있다던가? 편의점에는 하루에 한 번은 나온다는 무지막지한 빌런들의 짤은 요새 SNS에 꾀나 인기와 공감을 얻고 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암흑이 있는 것처럼, 반드시 존재하는 그들. 빌런.


카페, 음식점, 옷가게 등 여러 곳에서 일해보고 운영해본 지난 경험들은 '손님은 왕'이란 말을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손님도 나를 선택해서 왔고, 상식적인 선 가운데 우리가 약속한 사회적인 선 안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고 공생하는 관계라고 더 생각하고 싶다. 손님은 당연히 반갑고 좋고, 또 고맙다. 내가 손님 입장이 됐을 때엔, 맛있고 이쁘고 서비스도 좋은 그런 업소들이 반갑고 좋다.


아무튼 그래서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기대감에 휩싸였었다.

이쁘고, 센스 있고 멋진 곳들이 넘쳐나는 - 특히나 카페와 레스토랑 - 한국에 살게 되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국 거주 1년 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벌써 문전에서는 3번 거절을 당했으며, 많은 그 멋들어진 공간들이 '노키즈'란 사실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미국에서도 파인 다이닝이라던지, 7살 정도 아래의 아이들이 똑바로 앉아 있거나 장시간 코스 요리를 즐기기 어려운 곳은 Kids-not-allowed(노키즈 순화된 텀) 까지는 경험해 봤어도, 왜 대체 카페나 불을 안 쓰는 밥집이 'NO Kids'란 말인가. 말도 노키즈- 완전 짜증 나게 말하는 느낌이다, 소리 질러 노키즈!

나름 직업병이 있어 잘 브랜딩 된 곳, 스토리가 살아 있는 곳. 메뉴의 폰트 사이즈와 컬러, 그릇의 색과 컵의 사이즈를 보며 그 공간의 섬세함과 노력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곳을 보고 싶지만. 나는 이제 두 아이 엄마이기 때문에 놀이방이 있는 감자탕 집에나 가야 된다는 말인가...


성인 71%가 찬성하는 입장도 당연할 말은 많겠다. 사유지니 괜찮다, 법정 문제는 없다. 편의를 위해서고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는 것도 중요하다. 일부 개념 없는 부모들이 너무 많고 업주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법정 사례들이나. 개인 경험들에서 오는 문제일 것이다. 나도 아이를 가진 부모이지만 정말 말문이 막히는 행동들을 하는 부모들을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되며 깊은 단전에서 분노가 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본 다면 글의 시작에서 이야기했듯 빌런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이 빌런들은 다양한 곳과 다양한 각도로 무례함으로 무장하고 우리와의 접점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identity를 가진 (아저씨, 아줌마, 여성, 아이 등) 그들을, 모 딱히 한 그룹으로 몰아서 나무랄 수는 없다.

빌런은 누구나   있지만 우리는  불쾌함을 누군가는 책임지길 원한다. 타깃 하기 좋게 무리를 나누어서 세워 놓기 시작할 , 무서운 일들은 일어나기 시작한다. Pre-judgement, 먼저 판단하고 상대방을 보고 행동한다. 마치 이건 명품숖에 허름하게 옷을 입고 갔다가 무시를 당했더라나, 남자가 울면 어디서 사내가 우냐라고 말하는 것과도 동일하다. 모든 부모와 아이는 정상적인 개념 범주 안에서 행동할  없을 것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기저귀를 치우지 않을 것이고 이유식을 데워달라고  것이며, 아이는 뛰어다니다가 남의 커피를 쏟고 나는 그것을 배상하지 않는 정말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는 이름표가 나와 나의 남편, 나의 아이에게 자동으로 따라붙게 된다. 당연한 권리. 우리가 단지 사람이기에.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있었던 누구도 논하지 않았던 권리가, 아이의 입장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판단 당하고 말았다.


서울 경치가 다 내려다 보이고 건축가가 지었다는 예쁜 성북동의 카페는, 우리 아이는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는 그런 '문제'적인 아이일 거라는, 나는 그런 애 하나 보지 않고 커피나 마시며 수다나 떠는 엄마 일 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개인이 가진 고유의 모습 때문에 일어나는 차별들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마늘 냄새를 풍기지 않냐고 물어본 그가 갖고 있는 편견이었다. 내가 동양인이기에 영어를 못할 거라 생각하고 내가 앉은 테이블을 건너뛰고 다른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던 도넛 가게의 오만함였다. 히스패닉계 남성이기에 비싼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할 거니, 왜 남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백인 여성이 가진 공격성 일 것이다. 아이가 가진 고유의 모습, 그 바꿀 수 없는 본질이,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해야 했던, 하던 일을 그만하게 된다는 것. 편의와 몇 경험에 의한 일반화가 우리 딴에는 선하고 젠틀하게, 차분한 폰트로, 예의 바르게, 트렌디하게, 혹은 힙하게 NO KIDS를 세기며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무례한 한 그룹의 사람들을, (키즈+부모) 손쉽게 분리하기로 했다. 노키즈가 차별이 아니라 편의를 위한 개인, 업주의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한 집단의 본질, identity  때문에 오는 불편과 분리가 어떻게 justify(정당화) 될 수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미국에서 내가 동양인이기에, 여성이기에 어쩌면 더 받았던 차별의 경험들이 위험 레이더를 울렸다. 저기 저 동양인이 싫다는 건 본인의 기호 아니냐 내버려 두어라 싫다는 데랑 큰 차이가 없다. 애 있는 가족들이 내가 있는 공간에 있는 게 싫다. 그 공간이 비록 정말 특성이 있는 공간상의 구분이 필요한 곳이 아닌 것. 혼란함 속에서 노키즈에 관해 리서치를 시작했을 때 애 셋 엄마지만 노키즈는 적극 찬성한다는 글을 보았다. 이쁜 카페에 가서 가서 수다를 떨고 싶다며, 자신의 아이 셋은 할머니와 잘 놀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왜 굳이 아이들이 안 어울리는 공간에 데고 와 서 꾸역꾸역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도움받을 데가 있는데 넌 없어? 어머, 안됐다.


그렇게 우리는 나만 괜찮다는 생각으로, 나는 아이가 없으니 상관없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차별받는 자는 내가 아니니까. 노키즈, 노시니어, 노아재존. 명백한 Ageism(에이지즘) 나이에 따른 편견과 차별.

왜 우리는 나이가 있으면 입 열기 조심하며 혹여나 내가 소위 '나 때는 말이야' 라며 '라떼'를 말해서 흉보임을 당하고 있을까 걱정하고, 어린것들은 머리에 꼭 피가 말라야 하는가.

한 사회의 성숙도는 어디서 오는 걸까. 오늘날 명백한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날씨까지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환경을 위한 어떤 행동들이 있을까 고심하지 않고, 나 하나 애쓴다고 되겠어, 라는 미숙한 마음처럼-


분명 업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인 제도나 마련되어야 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무개념의 일부 부모들이 변화해야 하는 귀찮은 과정들이 있겠지만.

그 과정과 기회들 조차 묵살해버리며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전에 선을 그어 버리는 것.

20년 전쯤 갔던 중국의 백화점에는 화장실의 문이 없었고 문 앞에서 휴지를 3칸씩 띄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다시 찾은 중국은 변화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도 지방 쪽의 기차역엔 화장실 문이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당연한 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일부 부모들이 있으니, 그런 분들과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들을 위한 자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써서 붙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트라우마가 없다면 모든 부모가 무개념일 거라고 쉽게 단정 짓기보다 여러 유형의 빌런들을 대비하셔야 한다. 당연한 매너들과 개념들을 손님에게 일일이 바라지 못한다면, 그 가게만의 자체적인 룰을 공지하면 좋을 것이다. 아니면 이 우주가 선한 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돌아간다는 절대적 사실에 믿음을 두어보시는 것도 그동안 많은 모습의 비즈니스가 고수하고 성공한 방법이다. 사실 나 자신이 언젠가고 그런 '무식한' 손님의 모습을 띨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항상 일말에 있다. 부모님의 식당을 간혹 도울 때,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 자제를 요구해도 고함을 지르며 손님이 왕이라고 외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미국 식당에 흔하게 붙어있던 "우리는 당신에게 서비스를 거부할 수 도 있습니다"라는 사인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문도 없이 거절받는 아이들. 어른들의 잘못이었을 텐데 그들은 피해받는 가장 약한 그룹이다.

어른들은 아이가 노키즈인 그 식당에 못 간다고 모 얼마나 큰일이 나겠냐고 한다. 그냥 그 옆에 가게 가라고 한다. 첫째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만 3살이었던 아이와 할머니 밭에 가는 길가에 있던 제주도 음식점에 들린 적이 있다. 딱새우로 만든 파스타와 한라봉 귤을 올린 특색 있는 피자를 먹고, 정원이 제법 있어 뛰어 놀기도 하고 아이와 기분 좋고 인상적인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외식을 하고 싶던 아이와 다시 찾아간 그곳은 노키즈로 변해 있었다. 노키즈란 말은 간판에 더해져 있는 걸 보지 못한 우리는 가게 안에 들어가서 아이를 보고 나서야 안된다는 거절을 당했고, 아이는 본인 때문에 그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사실에 슬퍼하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했다. 나와 남편은 수치심을 느꼈다. 마치 우리가 이곳을 쑥대밭을 만들려고 작정을 하며 온 것 같았다. 나의 정체성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일은 조국에서는 없을 거라고 착각한 잘못이었다.


아들에게 우리만의 특별했던 추억도 아이에게 잊으라고 해야 할까, 앞으로 10년은 족히 못 갈 곳이니까?

난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할 기회를 꿈꿔본다.

우리 부모님도 하시는 요식업계가, 작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던 자영업자의 경험과 연민으로, 정발 잘 됫음 좋겠다. 열심히 일하는 모든 진정성 있는 사람들이 일구는 사회가 정말 멋지고 자랑스러우면 좋겠다.


‘어머 우리 아들 이렇게 의젓하게 엄마 아빠랑 멋진 곳에서 외식도 다 하고.  다 컸네 우리 아들! 고마워! 우리 더 같이 놀러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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