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삶을, 소위 갓생을 동경하며 그들의 일상을 숏폼이던 릴스건 유투브건 엿보기 시작한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을 하는 언니들을, 운동 잘 하면 언니를 보며 감탄하고, 영양의 발란스도 맞고 생각해 보지 못한 조합의 재료들을 휘리릭 섞어 내버리는 레시피를 생성하는 바지런한 사람들을 보며 다짐한다. 어휴, 나도 오늘은 채소 좀 더 넣고 제대로 만들어 봐야겟네 라며. 쇼핑이면 쇼핑, 정리라면 정리, 아이들과 놀러 갈 곳을 이다지도 열심히, 혹은 새로운 식당이라며 줄줄이 리뷰를 써 내놓는 숨 가쁜 갓생들의 피드의 파도.
안 봐야지, 뇌 쪼그라든다던데 하면서도 어느새 손쉽게 나에게 도파민을 선사하는 스크롤링은 이어져 간다. 마치 나와 저세상의 유일한 끈처럼 계속 당겨주고 비벼준다.
원래도 드라마보다는 다큐빠였던 나지만, 첫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유독 이누이트들의 생활을 그린 다큐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유튜브에 있던 한글, 영어로 된 다큐는 거의 모두 섭렵하였고, 툰드라 근처 어디에라도 사는 부족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Ulu라는 전통 칼을 이용하여 얼은 물개나 일각고래의 고기를 잘라 요새는 일본 국민 간장 끼꼬만에 찍어 먹는 그들의 삶. 예전처럼 생식만 고집하거나 동물의 피로만 비타민과 오메가를 얻진 않지만, 아직도 그들의 생활의 방식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간다. 어제 우연히 다큐 피드를 넘기다가 또 발견한 새로운 이누이트 부족의 다큐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들이 Mattak, 먹떡이라고 발음, 얼린 고래고기를 먹는 장면은 언제나 즐겁다. 오돌오돌할 거 같은 마딱을 조물조물 씹는 ASMR이 왠지 모르게 편안함을 준다.
특히 겨울에 더 기름이 오른다는 비버나 카리부의 가죽을 따고 준비해서 놀라운 손재주로 부츠나 옷을 만드는 모습이나, 거기서 도축된 고기로 겨우내 식량을 비축하는 바지런한 모습을 보며 이상한 대리만족을 느낀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영하 75도의 삶, 조금만 벗어나면 현대 문명의 편리함이, 콸콸 쏟아지는 따듯한 물이 있는 도시도 있지만 떠나지 않는 방식. 더 새롭고, 더 최신이고, 더 편리하기만 바라는 우리들의 욕심과는 다른 모습.
그들이 별미로 먹는다는 툰드라 베리들의 새빨간 색이- 난 하우스에서 농약으로 자라났을 빨갛디 빨간 토마토를 건강하다고 믿으며 케이지에서 서로를 밟고 자랐을 닭들이 낳은 하지만 항생제를 단지 안 먹였다고 해서 무항생제 달걀이 그나마 낫겠을 것이란 위안으로 함께 스크램블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이고.
그들이 필수로 먹어줘야 극한의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물개의 새하얀 지방만 넣은 유리병을 소중히 껴안은- 난 정제되어 하얗디하얀 밀가루로 만들어진 빵, 보기 좋게 구워진 각종 페이스트리를 언젠가부터 당연하게 친구들을 만나면 식사 뒤 먹게 되는 디저트의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진정한 건강함. 겉으로만 뻗어져 나가는 화려함이나 시끄러운 자기주장이 아닌 것 묵직하되, 진실한 것들.
지방과 고기만 섭취하고 과일과 채소는 먹지 않던 이누이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낮은 심장 관련 질환과 암에 걸리는 것을 Inuit Paradox, 이누이트 파라독스라고 한다. 캐나다 시민권을 가지고 시니어가 된 이누이트들이 정부에서 지원하는 요양원에 들어가. 마트에서 남이 잡고 손질하여 쉽게 구할 수 있던 소고기와 따듯한 빵을 먹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각종 질병을 얻게 된다고 한다. 우리 몸에 보이지 않게 시간과 역사로 저장된 룰을 거스름에 대한 대가이다.
나의 몸에 새겨진 우리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먹었을 음식들. 그리고 소중히 여겼을 인생의 가치들.
그것을 찾아 차곡차곡,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 죽어야 하는 마음으로, 차곡. 차곡.
'에스키모'라는 표현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란 표현으로 식민지 지배를 했던 시대의 표현으로 차별하는 단어입니다. 이누이트라고 표현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