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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Nov 20. 2023

방황의 끝

2013년 가을

복수전공


‘그럼 그렇지! 사학과 전공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지? 그래서 무슨 전공했는데?’


과연 무엇이었을까? 복수전공은 졸업요건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사학과 말고도 또다른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복수전공을 하는 옵션말고도 다양한 졸업 요건이 있었다. 그 당시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린 결과, 나는 복수전공을 하는 것이 졸업까지 가장 쉬운 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의 또다른 전공은 고전학이었다. 복수전공을 인문학부에서만 해결하다니. 취업시장에서 기피대상 순위가 있다면 나는의심할 여지 없이 상위권으로 가고 있었다.




‘배스킨라빈스’처럼 여러가지 맛을 담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본 경험이 있는가? 여러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골라서 한 통에 담을 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의 아이스크림을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골라 놓은 맛과 가장 어울리는 맛을 조합하는 것도 중요하다. 두번째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이것과 매우 비슷했다. 2가지 전공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두번째 전공은 여러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사학과와 고전학이 잘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영리하게” 고전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대학 성적표를 보면 나는 3학년이 되어서야 ‘로마사(史) 개론’을 들었다. 나는 애초부터 고전학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가끔씩 눈길은 갔지만), 온갖 다른 전공들을 맛보는 “방황”을 마친 후에야 고전학과에 왔음을 알려준다. 두번째 전공을 만나기까지도 시행착오와 긴 기다림이 있었다. 아무튼, 다음은 내가 방황한 장소들이다.


튜토리얼 수업에 대한 글에서 잠시 언급했듯, 정치학을 맛보러 갔다. 사학과와 비슷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다른 전공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내게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수학 혹은 과학의 요소들이 (계산식 같은 거나 복잡한 숫자들 말이다) 최대한 없어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 나는 수학의 정석에서 아주 첫 부분에 나오는 집합, 지수/로그에도 애정을 붙이지 못했다 (물론, 그것들도 내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각설하고, 2년차가 되자마자 정치학 과목에서 그래프들이 깜짝 등장하기 시작했다. 숫자들이 작은 표 안에 아득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보자마자 수강포기를 신청하고, 복수전공에서 정치학도 내렸다. 학적에서 ‘복수전공’ 항목은 다시 공란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 사회학도 비슷한 이유로 그만두었다 – 여기에서는 심지어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을 복수전공삼기도 했는데, 경제학의 경우 정말이지 수학문제들이 가득이라고 했다. 그래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기억이 있다. 심리학에도 관심을 갖고 개론 수업을 들었는데, 이미 개론에서 ‘신경전달체계(?)’등의 과학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2년차 심리학 수업 중 하나였던 ‘생리 심리학’에서는 노골적으로 과학이 나왔다. 형형색색 칠해진 뇌의 각 부위들과 신경들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것들의 작동 체계를 이해해야만 했다. 다양한 학과에서 온 수강생들 중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던 학생들은 이미 배운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기분 좋은 반응을 보이며, 강의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수월하게 소화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2주 정도 듣고, 얼른 수강포기를 했다. 이후, 심리학도 복수전공 후보 리스트에서 탈락시켰다.




3년차가 접어들 즈음에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이상 이곳 저곳 방황하며 기다릴 수 없었다. 3년차가 넘어서도 복수전공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결국 5년차, 6년차까지도 학교를 다니게 될 것 같았다.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사학과에서는 이따금 ‘고전학과’의 몇몇 과목들이 좋은 점수를 받기에 아주 제격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다가오는 학기에 로마 역사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운이 좋게도 좋은 점수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곳에서 흥미를 느끼고 좋은 결과로 끝을 맺자, 고전학을 두번째 전공으로 하는 것에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중학교를 다닐 때 사회과목 교과우수상을 받았을 것처럼, 이런 일들은 항상 우연히 생기나보다. 그렇게 나는 고전학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고전학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사학과라는 “맛”과 잘 어우러졌다. 사학과에서 처음 만난 ‘서양사 개론’ (교수는 OHP필름을 쓰고, 온갖 소스 냄새를 자랑하던 수업조교가 있던 그 강좌)에서 처음 나오는 시기는 르네상스였는데, 왜 거기서부터 시작인지는 의문이었다. 몇 학기가 지나서야 알게 된 점은: 사학과에서는 아주 늦은 중세시기부터 현대사까지 다루었고, 고전학과에서 기원전 고대부터 중세로 접어들 시점까지 가르쳤다. 고전학을 전공한 덕분에 하마터면 접하지도 못할 뻔 했던 시기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서양사에 쏙 빠져들게 한 ‘미노스’와 ‘미케네’ 문명은 사학과가 아니라, 고전학과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시대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또 어떻게 이루어지면 좋을 지에 대해서 쓰고 싶지만, 이미 그에 관한 짧은 글을 썼다). 


고전학과에서 얻어갈 수 있었던 다른 혜택은 라틴어 수업이었다. 그 언어는 온갖 복잡한 문법들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문법을 맞춰가는 것에 은근한 중독성이 있었다. 중독성을 기반으로 몇 과목의 라틴어를 기초반 이후로도 조금 더 이수할 수 있었는데, 아마 그 때 기회가 없었으면 라틴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지금까지도 없었을 것이다. 감사히 생각한다. 사학과 과목을 이수하다 보면 라틴어 단어나 구절이 생각 외로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을 쉽게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서양사를 전공하게 되면 전반적으로 “쓸모 있는(?)” 언어들이 몇 가지 있는데,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라틴어를 배워 두면 종종 도움이 될 것이다). 아! 고전학과는 실용적인 면에서도 좋았다. 고전학과가 제공하는 강좌들 중 몇 가지는 사학과 전공을 이수하기 위해서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보다 수월하게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 고장이 난 지 오래된 시계. 그래도 하루에 2번은 맞다 (?)


고전학에서 몇 과목을 맛보고 난 뒤, 이것을 복수전공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가 방황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사학과와 고전학과, 이 두가지 “맛”은 적절하게 어우러졌고, 서로 시너지 효과를 주는 관계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지금 생각해보면 두번째 전공을 찾느라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여러가지 전공을 맛볼 수 있었던 좋은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답답했는데, 이제 오니 감사하다니.


여하튼 큰 가닥들이 잡히고 나니까, 대학 졸업이라는 원대한 목표(?)까지 조금만 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면 되었다. 어느덧 대학 과정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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