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서 도쿄의 오래된 킷사텐에 대해 읽었다. (킷사텐은 우리나라로 치면 다방같이 옛 분위기가 나는 카페다.) 사장이 늙었는지 가게가 낡았는지, 모종의 이유로 킷사텐은 문을 닫았고 일하던 젊은 직원이 옆 동네에 킷사텐을 새로 열었다고 했다. 세시부터는 대화 없이 재즈를 듣는다고도 했다. 도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문장에서도 느껴지는 젊은 직원의 뚝심 때문이었는지 세 시부터는 재즈로만 채워지는 공간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쿄행 비행기 티켓은 이미 끊었고 킷사텐 외에 특별한 계획은 없었고 캐리어에 적당히 짐을 챙겨 출발했다. 도쿄는 따뜻한 줄 알았더니 한국과 마찬가지로 시리게 겨울이었다.
우박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내렸다. 급속도로 추워진 날씨 탓에 빗방울이 얼어버려 우산 끝을 톡톡 두드렸다가 굴러떨어졌다. 바닥을 보니 눈이 쌓인다기보다는 알갱이들이 굴러다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바람이 이리저리 불 때마다 얼음 알갱이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며칠만 머물다가는 여행자는 어쩔 도리 없이 가져온 옷을 모두 껴입고서 킷사텐이 있는 시모키타자와로 향했다. 도쿄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인데 활기찬 시부야나 긴자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동네였다.
지하철역에서 내리니 아무도 없었다. 눈이 바닥에 구르는 소리와 간간이 지나는 택배 트럭의 바퀴 소리뿐이었다. 분주히 어딘가로 출근하거나 이동할 시간이 지난 주택가였다. 그럴 법했다. 모든 것에 한 층의 얇고 흰 막이 덮여있었다. 그네 앉는 자리와 담벼락, 나무와 도로에도. 얇지만 너르게, 고요하게. 얄팍한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풍경은 아무도 없어서 완벽했다. 이런 고요가 얼마 만인지. 문득 이런 시간이 내게 필요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 올의 자극도 없고,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눈치도 없고, 일정한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의무감도 없는 세계가. 어떤 표정도 꾸며낼 필요가 없어지니 오히려 웃음이 났다.
왜 일상에서는 이런 편안함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는지 생각해보니 집조차도 내게는 다음을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휴식조차도 계획해서 쉬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힘을 꽉 주고서 속으론 긴장하고 겉으로는 웃으면서 살고 있었다. 힘 좀 빼고 살자니까. 또 실패했다. 사실 나는 힘 빼고 살기 위해 백번 천번 노력했고 천번 만번 실패해왔다. 그래서 여행을 해야 했다. 일상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나를 일상에서 분리한 후에야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워서 손가락을 덜덜 떨면서도 킷사텐에 도달하는 대신 오랫동안 골목을 돌았다.
골목을 돌다 돌다 손가락엔 감각이 없어졌을 때쯤에야 킷사텐에 들어갔다. 내가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그리워했던 오랜 과거가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소파에 푹 들어앉아 몸을 녹이며 간간이 바뀌는 재즈 음악을 들었다. LP의 지직대는 소리는 공간에 잘 어울렸다. 깨끗한 디지털 음질보다 풍부함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몸을 녹이면서도 계속해서 밖을 생각했다. 지금까지조차도 그날을 생각하면 킷사텐보다도 가는 길이 더 떠오를 만큼.
이제는 얼음 눈이 내리는 시모키타자와를 만나기 위해 그 책을 읽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힘을 빼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한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또다시 한숨 쉬며 내딛는 발걸음을 느끼면서 ‘항상 힘을 빼고 산다’는 명제는 포기했다. 내 삶이 담긴 그릇은 아마 느슨한 모양은 아닌가 보다. 그렇지만 도쿄를 생각해보면 힘을 줬다 빼기를 반복하는 이 삶은 마냥 나쁘지 않다. 내가 만난 도쿄는 이런 삶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일 테니까. 앞으로는 또 어떤 장면을 만나려는지, 아픔 속에 기대가 된다.
연재글로서는 마지막 편이지만 여행과 에세이는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