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간은 서비스업 종사자로 일했다. 본업은 시각 디자이너.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도피의 개념이 컸다.
작은 사무실 안에서 내 인생에는 없을 것 같았던 공황장애를 겪었더랬지. 어느 날은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숨이 막혀 엄마한테 울면서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집 근처 역 앞 쉼터에서 숨을 헐떡이며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나 때문에 부모님이 참 많이 힘들어하셨던 것 같아 죄송하다.
결국은 퇴사를 하고선 먹던 약을 끊었고, 바로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역시 퇴사가 만병통치약) 그러다가 어느 와인바 레스토랑의 홀서버 지원 공고를 보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로만 몇 개월 해본 서비스업을 정직원으로서 1년 동안 다녀본 건 처음이었다.
외워야 할 것들이 우선 많았다. 27개의 테이블 번호를 익숙하게 외우는 것도 1달은 걸렸던 것 같다. (최근 들어온 파트타이머 몇 명은 하루 만에 테이블 번호를 다 외우는 게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당시에는 손님들에게 메뉴와 와인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해줘야 했기 때문에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 와인의 포도품종과 연도, 생산 국가 등 모두 외워야 했다. 열심히 설명을 외워서 막상 테이블에 가면 어버버 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와인 오픈을 할 줄 몰라서 몇 주는 코르크를 잡고 낑낑 대기도 했고, 와인 잔을 닦다가 힘 조절을 못해 깨트린 잔 수만 10잔은 넘을 거다.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졌을 때, 당시 부매니저님이 진열장에 있는 소매 와인을 팔아보라는 미션을 주셨다. 고객이 와인 추천을 요청하시면 소매 와인을 몇 병을 들고 가서 설명을 해주고, 제일 선호하는 스타일의 와인을 고르시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하면 됐다. 사실 매장 측에서는 소매 와인이든 메뉴판의 와인이든 팔면 그만이긴 한데, 우리끼리의 재미와 성취감이었다. 새로운 와인을 또 외워서 손님들에게 설명해 주는 게 한편으로는 부담도 많이 됐지만, 추천해 드린 와인을 골라 맛있게 드셨다고 하실 때 드는 뿌듯함이 참 좋았다.
이제는 전보다 능숙하게 손님을 대하고, 음식에 대한 설명도 잘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테이블 오더로 바뀌어서 메뉴 설명도 필요 없고, 손님들을 주시하고 있을 필요도 없이 서빙만 잘 하면 된다. 심지어 물, 냅킨 등도 테이블 오더로 요청받으니 이제 우리가 주시할 건 빌지 뿐이다. 몸은 참 편해졌는데, 그 당시 느꼈던 성취감이나 즐거움은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잔 닦고 서빙하는 기계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고, 시간이 너무 안 가기 시작했다. 그 네모난 공간이 답답해지고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나는 본업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성취감을 느끼고 커리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영역은 본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 한 달 동안 5번의 면접과 연속된 탈락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무너진 상태가 됐다. 바로 이직을 하리라 결심했는데 계획대로 되진 않았고, 퇴사 후 2박 3일의 여행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와서 다시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