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 집 앞에서 넘어져서 무릎이 크게 다쳤다. 집에 들어갔는데 아빠가 보시더니 화를 내셨다. 내 손에는 천원을 지어주며 엄마한테 가라고 내쫒으셨다. 무릎에는 피가 철철 나고 있었고, 나는 꼬깃한 천원을 쥐고 집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 앞 가구집 사장님이 내 무릎을 보시더니 밴드를 붙여주셨던 기억이 난다. 정말 버스를 타고 엄마한테 갔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그 후의 다음 장면으로는 엄마가 내 무릎을 씻겨주며 "애가 이렇게 다쳤는데 쫒아내면 어떡해?" 였다. 여전히 내 왼쪽 무릎에는 그 때 낫던 상처의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꽤나 큰 상처여서 병원에서 꿰멨어야 했는데 밴드만 붙여놨더니 흉이 남아있다.
어렸을 때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녔던 엄마와 밤 늦게까지 버스 운전을 하던 아빠 사이의 두 딸. 부모님은 매일같이 싸웠고, 엄마를 향한 아빠의 폭력도 수없이 봤다. 그 때는 엄마를 때리고 욕하는 아빠가 참 무섭고 싫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아빠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대구에서 살다가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서울의 낡고 좁은 빌라에 이사왔다. 그리고 20년 이상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버스 운전을 하며 가족을 먹어살렸다. 밤 늦게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어린 두 딸만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아내는 오늘도 교회에 가고 없다. 집안 꼴은 엉망이다. 참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아내는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남편도 교회에 같이 다니길 원하며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했다. 참지 못한 남편은 아내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다. 두 딸은 작은 방에서 벌벌 떨며 운다.
이혼을 하고 보다 편한 삶을 살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선택지를 제쳐두고 아빠는 책임감이라는 돌덩이를 지고 평생을 운전대를 놓지 않고 두 딸을 묵묵히 잘 키워내셨다. 내 무릎의 흉터는 그 당시 아빠의 고단하고 답답했던 삶의 한부분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