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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을현 Sep 20. 2024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1년간 함께 달려온 나의 무지 퍼셀, 이곳에 잠들다 (버리고 왔다는 뜻)


지난 1년간은 서비스업 종사자로 일했다. 본업은 시각 디자이너.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도피의 개념이 컸다. 


작은 사무실 안에서 내 인생에는 없을 것 같았던 공황장애를 겪었더랬지. 어느 날은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숨이 막혀 엄마한테 울면서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집 근처 역 앞 쉼터에서 숨을 헐떡이며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나 때문에 부모님이 참 많이 힘들어하셨던 것 같아 죄송하다.


결국은 퇴사를 하고선 먹던 약을 끊었고, 바로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역시 퇴사가 만병통치약) 그러다가 어느 와인바 레스토랑의 홀서버 지원 공고를 보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로만 몇 개월 해본 서비스업을 정직원으로서 1년 동안 다녀본 건 처음이었다. 


외워야 할 것들이 우선 많았다. 27개의 테이블 번호를 익숙하게 외우는 것도 1달은 걸렸던 것 같다. (최근 들어온 파트타이머 몇 명은 하루 만에 테이블 번호를 다 외우는 게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당시에는 손님들에게 메뉴와 와인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해줘야 했기 때문에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 와인의 포도품종과 연도, 생산 국가 등 모두 외워야 했다. 열심히 설명을 외워서 막상 테이블에 가면 어버버 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와인 오픈을 할 줄 몰라서 몇 주는 코르크를 잡고 낑낑 대기도 했고, 와인 잔을 닦다가 힘 조절을 못해 깨트린 잔 수만 10잔은 넘을 거다.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졌을 때, 당시 부매니저님이 진열장에 있는 소매 와인을 팔아보라는 미션을 주셨다. 고객이 와인 추천을 요청하시면 소매 와인을 몇 병을 들고 가서 설명을 해주고, 제일 선호하는 스타일의 와인을 고르시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하면 됐다. 사실 매장 측에서는 소매 와인이든 메뉴판의 와인이든 팔면 그만이긴 한데, 우리끼리의 재미와 성취감이었다. 새로운 와인을 또 외워서 손님들에게 설명해 주는 게 한편으로는 부담도 많이 됐지만, 추천해 드린 와인을 골라 맛있게 드셨다고 하실 때 드는 뿌듯함이 참 좋았다.


이제는 전보다 능숙하게 손님을 대하고, 음식에 대한 설명도 잘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테이블 오더로 바뀌어서 메뉴 설명도 필요 없고, 손님들을 주시하고 있을 필요도 없이 서빙만 잘 하면 된다. 심지어 물, 냅킨 등도 테이블 오더로 요청받으니 이제 우리가 주시할 건 빌지 뿐이다. 몸은 참 편해졌는데, 그 당시 느꼈던 성취감이나 즐거움은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잔 닦고 서빙하는 기계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고, 시간이 너무 안 가기 시작했다. 그 네모난 공간이 답답해지고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나는 본업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성취감을 느끼고 커리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영역은 본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 한 달 동안 5번의 면접과 연속된 탈락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무너진 상태가 됐다. 바로 이직을 하리라 결심했는데 계획대로 되진 않았고, 퇴사 후 2박 3일의 여행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와서 다시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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