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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다서다 Feb 12. 2023

꿈도 없었지만 걱정도 없었다.

불안한 어른이 된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또 나의 구미를 당길만한 것을 하는 것에는 항상 돈이 모자라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 같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넷플릭스로 재미있다는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면 피로가 몰려오고 글을 쓰는 것도 빈 여백에 진저리가 나길 여러 번이라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자라고 다짐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을 지나다 문득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다행히 내 기억 속에 어린아이였던 나의 그 시절 기억과 감정까지 소환되었던 것은 우연이라 하여도 참 소중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앞으로 좀 덜 불행해질 실마리를 조금 얻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부모님이 서로 떨어져 사는 것에도 분명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저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는 어린이였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집에서 할머니와 아빠와 함께 살던 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아직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지 위의 다른 형제들은 안 보이고 집에서 혼자 있던 때가 기억이 난다. 근처 텃밭에서 할머니가 일을 하고 계셨지만 어렸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그저 조금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낮잠도 자보고 마당에 나가서 개미들의 움직임을 구경하거나 강아지와 하루종일 놀기도 했다. 그래, 그때도 분명 심심하고 무료한 순간들이 잠시간 있기도 했던 것 같다. 시곗바늘의 초침이 너무나 느리게 움직여서 할머니집에 시계가 고장이 난 것인가 하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럼에도 무엇을 하기 시작하면 예를 들어 흙을 가지고 놀던지 산을 오르며 보물을 찾듯 모험을 떠난다던지 하는 행위에 있어서 매우 신이 나고 엄청난 몰입을 했었던 것 같다. 오직 걱정이 있다면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났나? 너무 늦으면 혼날 것 같은데?' 정도. 


막내로 태어나서 그랬을까? 어린이였던 나는 분명 순진했고 걱정이 없었다. 엄마를 보고 싶은 생각도 전화가 왔을 때 울음이 나서 그런 것이지 평소에는 분명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다른 친구들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식이 생기고 보니 어린이들은 분명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만큼 걱정을 하고 살지는 않는 존재임이 분명한 것 같다. 내 자식이어서 하는 말이지만 (내) 아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좋은 의미다). 오직 한 가지 생각이 가득한 것 같다. 지금 눈앞의 일(장난감, 놀이, 친구, tv, 게임)에 온전히 집중할 뿐이다. 


아무런-쓸데없는-생각 없이 온전히 집중하는 그것. 바로 그것이 '재미'라는 녀석이었다. 어린이들은 엄마에게 혼이나도 금방 잊어버리고 놀 수 있다. 상처가 된 기억들도 현재의 놀이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일단 놀고 심심할 때 상처를 꺼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느 날 판사로부터 어른이 되었다고 확정판결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물이 조금씩 차오르듯 어느 순간 넘쳐흐르는 컵을 보자니 아차 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것을 채워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걱정들로 채워서 놀랐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꿈이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강요하는 분위기의 세상에서 꿈을 정했더랬다. 꿈이라는 것이 한번 품어보니 참 사람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아, 당연히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겠지만 내가 이룰 수 없는 꿈을 꾼 건지, 그놈의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지금에서는 알 수 없어도 괜찮아졌다. 괜찮을 수 있게 되기까지 또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꿈이 없어도 행복했던 순간이 참 많았다. 비가 와도 좋았고 날씨가 맑아도 좋았다. 친구와 가까운 동네 한 바퀴만 돌아도 보물섬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익숙한 길은 정겹고 편안하여 좋았고 낯선 길은 설레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때에는 꿈도 없었지만 걱정도 없었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형식적인 청소년기로 끝날 것이 아니었음을 왜 어른들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이왕 알려주지 않을 거였으면 꿈이라도 꾸지 않게 해 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꿈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로 걱정만 가득 채운 내 머리가 불행했다. 무엇을 해도 불안감이 찾아오고 재미가 있다가도 금방 시들해지는 것은 운명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아니면 생산적인 일의 부재에서 오는 습관적 불안인지 헷갈렸다.


습관적이라면 고쳐보고 싶다. 운명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면 언제든 발동이 걸릴 것이라고 믿는다. 운명이 왜 괜히 그렇게 불리겠는가? 내가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야 하는 길일 것이다. 그러니 어렸을 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몰입했던 나의 능력을 되찾아 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걱정하는 것들의 원인을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이의 지혜로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이 걱정이 없다면 그것은 한 가지 이유이다. 자신의 약하고 어리고 힘없음을 방패 삼아 아무런 전투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나의 어린 시절에서는 학원공부보다야 놀이터에서 건강히 노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던 때라고 요즘아이들의 부담감이나 고민이 없을 것이라 단정하지는 않는다. 이 시대의 어린이들이 어른들 못지않은 우울감을 혹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어른들의 책임이다. 자신들의 실패를 자식들에게 성공으로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은 충분히 만족할만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선생님께서 공부를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고 하였는데 요즘 선생님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교권이 추락해서 일절 관여를 안 하는지도...


아이들은 통제되는 존재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요구에 맞춰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운명적 요구를 감당하기도 힘든 것이 인간이란 동물인데 다른 요구까지 들어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어렸을 때, 공부를 안 해도, 하루종일 놀기만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만한 시기로 언제든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공부도, 일도 놀이처럼 할 수 있는 지혜가 떠오를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수집하고 추진한다. 


운명이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나의 운명을 내가 조각하려는 어설픈 시도를 하지 않는다.


어떤 시행착오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실패야말로 달콤한 성공보다 스토리텔링에 감동을 주는 키워드임은 인생전반에 걸쳐 유효하다.


모두 너무 지쳤다면...


집중해서 놀고 있는 어린이에게 지혜를 배우자.


꿈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찐 어린이라면 그딴 거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이라면 "몰라요."라고 대답하던지 대답도 안하고 하던 놀이에나 집중할 것이다.


모르는 것이 정답이고 인생에 정답이 없는데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려고 도전하는 어른이들이 얼마나 많이 쓰러졌는지 우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생각보다 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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