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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는 안 가져요

- 정리수납전문가입니다

by 이혜경

우리 집 밀폐용기는 유리로 된 사각이다.

사각으로 딱 떨어져야 싱크대에 정리했을 때도 냉장고에 넣었을 때도 맘에 든다.

그래서 네모 아닌 동그라미 밀폐용기는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어떤 땐 참치캔을 사려다 거기에 테이프로 단단하게 붙여진 사은품 동그란 밀폐용기 때문에 구입을 포기할 때도 있다. 쓸모없는 물건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건 절대 사절이다.

가끔 커피에 붙어 있는 늘 똑같은 크기의 사은품 텀블러도 애물단지다.

이미 두 개가 있고 아직 너무 잘 쓰고 있기 때문에 새 텀블러는 필요 없고, 그래서 그 텀블러가 붙어있으면 일단 커피도 사지 않는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정리수납전문가들은 다양한 봉사활동을 한다.

그중 까리따스방배복지관에서 하는 무료급식 봉사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부활절이 가까운 어느 날이었다. 수녀님께서 부활절에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준비하신 거라며 닭과 계란 모형의 작고 귀여운 장식품을 봉사를 마친 우리들에게도 가져가도 좋다고 보여주셨다.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우리 집엔 놓을 데가 없는데?'였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전원이 이구동성 "우리 집엔 놓을 데가 없는데.."였다.

그리고는 정말로 아무도 그 장식품을 가져가지 않았다.

물론 수녀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성의를 무시했다거나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중년의 여자들 십 수명이 모인 곳에서 공짜로 주는 무언가를 전원 사양하는 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한편 이런 성향들이라 '정리수납전문가'가 딱 적성에 맞는구나 싶었다.




'정리'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비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 이미 들어와 있는 걸 내보내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결심과 노력이 필요해서 의외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우선 필요치 않은 걸 들이지 않는 연습부터 해보면 어떨까?

공짜니까 사은품 이라니까 남이 주니까 들이지 말고, 들이기 전에 정말 우리 집에 필요한가 한번 심사를 하는 과정을 가져보자. 그러면 우리 집에서 쓰지 않으면서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을 늘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안 쓰면 당근 하지'

정말 많이 듣는 얘기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파는 것도 그냥 주는 것도 다 일이다.

나의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그 일이 해결된다. 그러니 안 쓸 가능성이 높다면 차라리 들이지도 말자.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는 '보관옷'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그나마 둘째가 자라고 있으면 '둘째 보관옷'이고 입힐 시기도 어느 만큼은 구체적이지만 아직 임신 계획도 없는데 어느 날엔가 혹시 둘째가 생긴다면 입히려고 둔 옷들은 그야말로 '언젠가는'이다.

아무리 깨끗하게 세탁을 했더라도 섬유의 수명이 무한정 일수는 없다.

보통 면사의 수명은 평균 4년 정도라는 걸 본 기억이 있다.

리빙박스 가득가득 물려받을 옷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태어 날 그 아기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을까? '나도 새 옷 입고 싶다고!!!'


또 '물려받은 옷'도 있다. 가깝게는 아이의 사촌이 입던 것부터 엄마의 친구 자녀 옷, 주변 지인 자녀의 옷까지 이런저런 쇼핑백에 가득가득 들어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 물건들이 차지하는 공간은 의외로 작지 않다. 그런데 정작 이 옷들을 제대로 입힐 가능성은 체험상 높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즈의 옷들을 받은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정작 꺼내봤을 땐 이미 입힐 시기가 지났거나 엄마의 취향이 아니라서 결국 버려지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니 받아서 여기저기 두기 전에 우선 심사를 해봐야 한다. 그리고 입힐 것만 남기는 것이다.

그 쇼핑백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사실 우리 아이들이 누려야 할 공간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 공간을 갖기 위해 지불한 돈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아파트의 평당 가격을 평균 2,000만 원이라고 가정할 때 입힐지 버릴지 모를 물려 받은 옷들을 보관하느라 1제곱미터를 사용한다면 늘 600만 원 이상의 가치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걸 알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이렇게 단속을 하는데도 우리 집에 애물단지가 들어왔다.

홈쇼핑으로 세제를 샀더니 필요도 없는 보냉백이 딸려왔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자꾸 신경이 쓰인다. 역시 필요 없는 물건은 사람을 소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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