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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Jul 19. 2022

2008년 여름, 난데없이 춤바람이 불었다.

살사 동호회의 추억

회사 동료를 따라 처음 가본 살사 바(Bar)는 나에게 신세계와 같은 충격을 선사했다. 회사와 집 밖에 모르던 내가 살사댄스 동호회에 가입하여 일주일에 한 번 춤을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신나는 음악과 화려한 조명, 경쾌한 리듬과 스텝은 나를 매혹시켰고 낯선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려 춤을 추는 모습은 한없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곧장 동호회에서 알려준 서울역 수제 댄스화 샵에 달려가서 반짝반짝 빛나는 첫 은색 댄스화를 구입했다. 4센티 굽에 가죽이 대어있고 발목 끈이 엑스자로 감아주는 스타일이라 입문자들에게 가장 인기라고 했다. 댄스화만 신어도 마치 내가 프로 댄서가 된 듯 동호회 모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살사 바는 머나먼 이국의 섬과 같다.


문을 열면 음료를 주문하는 스탠딩 바와 모두가 자유롭게 춤을 추는 중앙 댄스, 살사 동호회에서 초보자들에게 강습을 해주는 구석 모퉁이 공간이 펼쳐진. 동호회에 새로 가입한 초보자들은 거울 앞 선배의 시범에 따라 몇 시간이고 줄지어 스텝을 연습했다.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이미 라틴댄스의 늪에 빠져버린 나는 발에 땀나도록 기초 스텝을 밟으며 머지않아 저들처럼 프리 댄스를 출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순진하게도.


댄스의 세계는 한없이 냉정하다.


같은 시기 입문한 동기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데 해 나는 계속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을 몇 개월이 지나면서 느끼게 되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지만, 동호회 강습이 있는 날만 가던 나에 비해 매일 저녁 살사 바에 출근하며 선배들의 개인지도로 실전 연습한 그녀들이 빨리 느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우스갯소리로 살사 고수가 되려면 춤을 잘 추던가 예쁘던가 라고 했던가. 평생 공부만 하던 모태솔로 몸치가 어쩌다 금단(?)의 세계에 빠져 이토록 쓰디쓴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을까.


살사는 혼자 추는 춤이 아니다.


초보자에게 허락된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면 살사 바는 본연의 정글로 돌아간다. 나는 한 줄기 담쟁이넝쿨이 되어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길 - 아니 그냥 나를 내버려 두길 – 하염없이 기다리며 여자 동기들이 댄스 신청을 받아 스테이지를 누비는 모습을 구석에서 지켜보았다. 어쩌다 운 좋게 자비로운(?) 누군가의 신청으로 무대에 나가면 행여 상대의 발이라도 밟을까 배운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미안함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스타일도 아닌데 먼저 나서서 춤 상대를 부탁할 만큼 과감한 성격도 못되니 모두가 신나는 프리 댄스 타임은 나에게 씁쓸하고도 고독한 자아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왜 솔직하지 못했을까.


살사의 세계에서는 춤을 잘 추는 것이 최고다. 바깥세상에서는 쳐다도 안 봤을 남자들이 살사만 잘 추어도 선망의 왕자로 등극한다. 환상적인 리드로 초보 여자 파트너도 공주로 만들어주는 실력자들이 뜨면 나의 가슴도 세차게 두근거렸다. 실력 있는 남자들과 춤을 추고 싶은 동기들은 너도나도 화려한 옷차림으로 간택(?)을 기다리는데 이런 상황이 뭔가 자존심 상한 나는 평범한 캐주얼 룩을 고수하며 고고한 학처럼 외로이 자리를 지켰다. 춤을 못 추는 솔직하지 못한 학.      


어둠 속에 교차되는 시선들.


춤에 대한 열망은 강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낯가림은 심하고 결벽증이 있다. 만만한 남자 동기들은 실력이 안되니 패스하고 착하고 담백한 중급 선배들을 타깃으로 했다. 특히 S는 공기업에 다니는 훈남이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인기가 많았다. 프리 댄스타임에 그가 나타나면 강력한 눈인사로 시그널을 보냈다.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그가 봉사차원의 파트너 홀딩을 해주면 그날은 어쨌든 성공. 이런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시선 A와 B가 있었다. 나는 춤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쩐지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 초보자가 찬밥 더운밥 가리겠냐 마는 춤에는 파트너 간 텐션이라는 것이 있었고 이들과 나는 말하자면 최악의 상성이었다. 나름 고수인 그들은 선심 쓰듯 나에게 춤을 신청했지만 무리한 테크닉 혹은 과도한 턴으로 추고 나면 언제나 어지럽고 언짢은 기분이 되었다.  나는 S를 쫓고 A와 B는 나를 찾는 기묘한 어둠 속의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속칭 F3가 등장한 건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난 시점에 새로운 남자 3명이 동호회에 편입했다. 자신들을 살사 초보라고 소개했지만 절대 초보가 아닌 그들은 멀끔한 비주얼에 대기업에 다니는 동창생들이라고 했다. 저만한 실력자들이 왜 초보 강습에 들어왔을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끈끈한 우애를 자랑하던 동기 여자들이 순식간에 사분오열 서로를 견제하는 적이 되었다. 셋이서 뭉쳐 다니며 신비주의 컨셉을 유지하는 속칭 F3의 눈에 들기 위해 동기 여자들의 신경전과 육탄전이 과열되었다. 점점 화려해지는 화장과 옷차림, 뒤풀이를 빙자한 잦은 술자리가 이어지고 이것이 댄스 동호회인지 짝짓기 모임인지 정체성마저 헛갈릴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을 즐기며 거만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들이 못마땅했던 나는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사태를 관망했다.    


초보 강습이 끝나면 졸업 발표회다.


파트너를 정해야 하는데 고민이 되었다. 내 부족한 실력도 문제지만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F3 중에 가장 잘생긴 K는 여자 동기 H와 금세 커플이 되었다. H는 처음부터 춤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어 모임에 나온 듯했다. 늘 '시시해'를 입에 달고 매사에 의욕이 없던 그녀는 F3 등장 이후 갑자기 출석률이 높아지더니 그들의 차를 얻어 타고 함께 놀러 다니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보였다. F3 중 제일 조용한 R은 가끔 말없이 나에게 춤을 신청했는데 동기들 중에 나와의 텐션이 가장 좋았다. R과 춤을 추면 부족한 내 실력으로도 충분히 즐겁게 살사를 출수 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음악이 끝나면 한 곡만 더 추고픈 마음이 절로 동했다. 조용하고 웃는 상인 그가 싫지 않았지만 F3의 다른 두 명과 여자 동기들의 눈이 부담스럽 의식되었다. 결국 파트너로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다른 누군가를 선택했다. 예상을 빗나가서일까? 당황한 R의 얼굴과 F3 두 명의 웃음소리, 동기들의 수근 대는 모습이 겹쳐졌다.


에필로그


1년간의 치열한 몸부림이 끝나고 나는 원래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무리 바라고 노력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인생의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초보 강습은 졸업했지만 여전히 미천한 실력으로 살사 바의 정글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고 외유는 1년이면 충분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가 잘하고 익숙한 삶에 집중하리라. 예전처럼 나에게 친근한 집과 회사, 강남의 - 살사 바가 아닌 - 학원들을 시계추처럼 오갔다. 화려한 조명과 라틴음악, 경쾌한 스텝들은 빠르게 잊혀졌고 이 모든 것이 한낮  타락지옥(?)의 꿈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우연히 동호회 동기를 거리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회식을 마치고 간다는 그녀는 호들갑스런 인사와 함께 묻지도 않은 동기들 소식을 전해주었다. 여심을 뒤흔들었던 F3중에 K 빼고 둘은 사실 유부남이었고 R은 심지어 돌쟁이 딸까지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아,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왠지 모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줌 남았던 미련마저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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