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강아지: 리치와 초롱(2)
사랑과 상실을 대하는 자세
초롱이는 나이를 알 수 없는 말티즈로 추정되는 강아지이다. 남편과 나는 초롱이의 나이를 15살 정도로, 말티즈가 많이 섞인 믹스견으로 생각하고 있다. 초롱이 남편의 집으로 온 것은 8년 전 5월이었다. 5월 말에 입양해서 아버님이 초롱이의 이름을 오말이라 지으려고 했는데, 어머님의 만류로 초롱이가 됐다. 야무지고 새초롬한 초롱이에게는 초롱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아버님과 초롱이가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이다. 아버님의 공장 근처에서 노숙하던 초롱이에게 아버님이 가끔 밥을 챙겨줬다. 초롱이는 말티즈 특유의 야무짐과 똘똘함으로 밥 줄 사람을 알아보고 공장에 자주 기웃거렸다. 어느 날 아버님과 같이 일하던 어머님이 초롱이를 보고 말했다.
"얘 안 되겠다. 이발 좀 시키자."
그렇게 이름 없던 초롱이는 이발을 당했고 멀끔해진 모습으로 또 공장을 기웃거렸다. 그것을 본 어머님이 또 말했다.
"얘 안 되겠다. 그냥 집에 데려가자."
그렇게 초롱이는 남편네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내가 초롱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어머님이 신기한 듯이 말했다.
"얘 왜 안 짖지?"
초롱이는 집에 낯선 사람이 오거나, 낯선 강아지를 만나거나, 달리는 오토바이를 보면 날카로운 소리로 왕왕 짖으며 노여움을 표출하는 강아지였다. 집에 있을 때도 집 밖에서 누군가 오가는 기척이 나면 굳이 닫힌 문으로 달려들며 왕왕 짖었다. 가끔은 산책을 하다 너무 짖어서 가족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초롱이는 스트릿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이 없는 강아지이다. 그런 초롱이가 처음 본 나에게 짖지 않고,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치 가족이 될 사람을 알아보는 듯이.
초롱이가 처음부터 그렇게 짖은 것은 아니다.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짖지도 않고 가족들과 꼭 붙어서 있으려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자, 그들에게 점점 믿음이 생긴 초롱이는 가족들과 조금씩 떨어졌다. 지금은 자신만의 공간인 의자 밑 강아지 방석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이불 속에서 함께 자다가 발치로 멀어지더니 나중에는 침대 밑에 내려와서 혼자 잤다. 지금은 안으려고 해도 귀찮다고 발버둥 치면서 빠져나간다.
나와 초롱이가 특별한 교감을 했던 것은 작년 9월이었다.
몇 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과 남편, 초롱이가 함께 살았었다. 나는 강아지와 함께 있으면 알러지 증상이 생겨서 나와 남편은 초롱이를 키울 수 없었다. 남편과 내가 결혼하게 되면서 원래 살던 집은 정리하고 어머니와 초롱이가 다른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사하는 날, 초롱이가 있을 곳이 없어서 원래 살던 집에서 혼자서 하룻밤 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초롱이가 빈집에 혼자 자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알러지 약을 먹고 침낭을 챙겨서 그 집으로 갔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침낭을 깔고 눕자, 초롱이가 옆으로 와서 누웠다. 우리는 꼭 붙어서 같이 잤다. 내가 그때 그렇게 행동했던 것을 지금도 어머님은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무섭지는 않았냐고 가끔 물어보신다. 그러면 나는 초롱이가 텅 빈 집에서 혼자 남겨지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우리 가족은 낯선 사람의 기척에 왕왕 짖어대는 초롱이의 기행을 ‘분리불안’으로 해석한다. 오토바이를 보고 짖는 행위를 보면 '전주인이 오토바이를 탔었나?'라고 생각한다. 강아지 간식이나 장난감을 보면 초롱이가 생각이 나고, 알러지 약을 먹고라도 주기적으로 초롱이를 만나러 간다.
처음에는 내가 초롱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초롱이를 동정하기 때문인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초롱이와 나는 불안에 대한 동질감이 있었다. 나도 트라우마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초롱이처럼 사랑에 대한 안정감을 원한다. 남편이 초롱이를 대하듯이 상대가 나에게 믿음을 준다면, 사랑받기 위해 꾸미던 모습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된다.
초롱이를 대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도 사랑을 배운다. 그에게는 리치에도 불구하고 초롱이가 있다. 상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을 준다. 초롱이도 생명을 다할 때까지 우리의 곁에 있을 것이다.
상실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딱 사랑한 만큼 슬퍼지는거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더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더 사랑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