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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령 Aug 20. 2024

허송세월

꿈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자유롭고 신나는 일이구나.

일을 그만두는 것을 계속 고민했다. 텅 빈 시간과 줄어든 수입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때까지 살면서 나는 뭔가에 확신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인생을 내비게이션 없이 발이 가는 대로 살아온 것만 같다. 그다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계속 뭔가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올해로 돈 버는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다.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레스토랑, 카페, 키즈카페, 패스트푸드점과 계약직으로 일했던 대학병원 외래와 대학교, 그리고 정규직으로 일했던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의 병동들. 어느 하나 쉬운 곳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일이 나를 괴롭게 한 적은 없었다. 일은 언제나 그저 일이었다. 내가 괴로웠던 것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나 자신의 상호작용 때문이었다. 나는 10년이 넘게 아주 많은 사람과 마주해야 하는 일을 했었다. 그들이 나에게 세상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배움과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나는 사춘기가 끝난 후에 내가 마주했던 많은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성장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마음속이 늘 시끄러웠다. 이제 혼자서 고요히 머물고 싶다.


3개월 전에 구독하던 인문 잡지 <한편>을 받았지만 읽지 않아서 책장 어디에선가 굴러다녔다. ‘쉼’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글이 실린 이 책 읽기를 여러 번 미뤘다. 읽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진짜 일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은 후였다. 쉬는 것조차 어떻게든 잘 쉬어보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미나 작가가 쓴 글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는 빼곡한 성취로 가득한 커리어가 아니라 일상에 더 자주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하기를, 그런 순간을 만들어내기를 원한다.
더 많은 독자를 갖기보다 깊고 유의미한 단 하나의 관계를 제대로 만들기를 바란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것 너머를 사유할 정신의 자유로움을 찾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이 탐구를 지속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그 여정이 고행이 아니라 기쁨이길 바란다.


글을 읽고 내가 왜 일을 쉬고 싶은지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선 일에서 오는 감흥이 떨어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일은 나에게 보람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환자들이 병원에서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상태가 나빠지는 것은 기억에 오래 남아서 뭔가 기운 빠지는 상태가 지속됐다. 예전에는 많은 것이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분만실이 아닌 이상 탄생의 축복은 나의 일터에서 찾을 수 없었고, 죽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우리는 사실 모두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예전에는 병원에서의 삶과 죽음에서도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지금은 그저 일로만 대하는 내가 있다.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어떤 때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나에게 다가오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것만 같아서 단호한 표정부터 장착하게 된다. 그러고 있으면 가끔 환자들은 나에게 밥은 먹었냐, 고생한다, 말하고 그냥 지나가거나 간식을 챙겨준다. 그러면 내가 한없이 자격 없다고 느껴지면서 그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전에 환자가 나에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몇 번 소리를 지르고, 경찰을 부른 이후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니, 그것보다는 아마 여기서는 내가 힘이 없고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작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그런 것 같다. 사랑만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은 어느새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 이제는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앉아서 일정하게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팟캐스트에서 김하나 작가는 말했다.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할 때 스트레스가 가장 극심하다고.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가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물질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스트레스 원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잠시라도 내 꿈에 가닿으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여전히 확신은 없다. 하지만 지금 직장 안에서 순응하고 사는 동안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 도망쳐보려고 한다. 그곳을 빠져나와 납작한 사람이었던 나를 신선한 공기로 가득 채워보려고 한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란스러움을 비우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보려고 한다.


한동안은 자영업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나이에 백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자영업을 하는 사업가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럴듯해진다. 사업가라 생각하면 한 번쯤 망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만 같다. 독립적으로 내가 나를 운영해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나는 아직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활이 궁핍해진다면 배달을 할 수도 있고 청소를 할 수도 있고 반찬가게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매일 아침에는 운동하고 저녁에는 글을 써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삶에서 허송세월이 필요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시간들. 의미라기엔 무용한 나날들. 내가 불안해하지만 않는다면 하고 싶은 것을 그저 할 수 있는 시간은 무엇보다 안온한 날들이 될 것이다.


꿈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자유롭고 신나는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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