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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약한 자아를 가지는가?

by His table

기독교 대안학교 대표인 A목사와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들 정기 회의가 있었다.

학부모 모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언제나처럼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조용하게 자리에

앉은채로 A목사의 강론을 들었다. 그날은 더 무거운 분위기로 떠들어대는 A목사의 강론에

학부모들도 모두 눈을 내리깔고 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했다.


"모세에게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러니 여러분도 불평과 불만을 내놓지 말고, 학교의 결정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모임이 끝나고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B 학부모는 C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얘기를 꺼내면 안되겠죠? 불순종이잖아요..."

실제로 몇 년 전 몸 담았던 교회의 대안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요즘 공교육의 문제로 지적되는 선생님들의 교권이

무너지는 문제와 달리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다. 물론 모든 대안학교를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이런 단체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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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사상 교육으로 아이들을 극우화 시키고, 극우 집회 연단에 세우게 했던 기독교 대안학교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되었다. 기자들이 해당 대안학교의 목사와 교육자들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이들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부모들이었다. 부모들은 극우 집회에 나간 것은 목사님의 강요가 아니라 아이들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아이들의 순종과 목사의 훌륭한(?) 가르침을 칭송했다.


오늘날 이런 기형적인 형상이 한국 교회에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일까?

왜 여전히 한국 교회는 전체주의적 문화가 노골적으로 가시화 되고, 용인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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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다시말하면 약한 자아를 가진 이들이 모인 집단은 민주적인 집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단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나는 한국 교회의 문제를 조명해보고 싶다. 그럼 약한 자아가 만들어지는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강한 자아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에고(Ego, 자아)는 슈퍼에고(Superego,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와 이드(id, 본능과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불안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어느 시점에 슈퍼에고와 이드 사이에서 분열을 느끼고,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에고가 형성되는 과정의 인간이 어떤 문화에 위치했냐에 따라 강한 에고와 약한 에고가 형성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에 대하여 업악하는 문화에서 자란 인간은 슈퍼에고가 이드를 윤리적으로 공격하고, 악마화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적 본능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윤리적으로 나쁜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내면에는 '죄의식'이 자리를 잡는데,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함으로 굴종적이거나 권위주의적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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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으로 한국 교회를 다시 조명해본다면, 한국 교회의 권위적-억압적 문화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약한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특히 죄의식을 자극하고 내면화하는 가르침과 순종을 빙자하여 굴종을 강요하는 설교가 만연한 한국 교회에서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양성되는 것은 분명한 인과관계로 볼 수 있다.


오늘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약한 자아를 만들어내는 소비주의, 능력(경쟁)주의, 권위주의적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 교회가 진정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을 길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은 성찰이다. 스스로가 얼마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지 인식해야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약한 자아'를 가진 존재로 전락시키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에 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창세기는 온세상의 창조주가 인권 선언을 했음을 알린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강한 자아로 창조하셨음을 선언한다.

그러니 더 이상 갈라디아서 2:20과 같은 말씀을 갖고 사람들의 자아를 죽이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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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 있기에 '기쁜 소식'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빙자하여 자아의 죽음, 약한 자아로 만들려는 시도는 결코 기독교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때에야 참 된 생명과 자유를 얻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참 된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 무덤에 묻혀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약한 자아는 죽고, 다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전한 자아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기독교적 복음이다.


결국 오늘 한국 교회가 이토록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적인 집단이 된 원인에는 참 된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가 다시 한국 교회 안에 자리 잡길 바라며, 그때에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작은 기도를 드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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