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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Feb 07. 2024

훈육이 버거울 땐

방성문

살면서 나만큼 화가 많은 사람을 마주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녀의 성격만큼은 차라리 배우자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이 많은 화를 다 표현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언제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지 파악하고 아이들에게도 협조를 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보통 한 달에 한번 정도 화가 나는 것 같고, 그 이외에도 배가 고프거나 많이 졸린 상황에서는 쉽게 예민해진다고 밝혔다. 이러한 취약한 상황일 때는 어린이가 크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엄마는 화를 낼 수도 있는데 그런 때가 오면 이렇게 말하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엄마, 어서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어린 자녀를 가정보육할 때 어려운 점 중 하나는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소리다. 예정된 통화 스케줄이라면 아이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거나 영상을 잠시 보여주었을 텐데 예기치 못한 통화는 엄마가 낯선 이와 대화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잔뜩 커진 아이들의 질문세례로 이어져 식은땀이 흐를 뿐이다.


통화 중인 상대방의 음성도 순수한 아이들의 목소리도 모두 겹쳐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응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이후부터 훈육은 시작되었다. 어른이 통화할 때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꾹 참고 통화가 끝나면 물어봐달라고 몇백 번쯤 말하니 요새는 키득거리며 비교적 지켜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몸이 아픈 어느 날, 아이들 식사만 간단히 차려주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정신이 혼미해 있었다. 그 순간 주말에만 게임을 하기로 규칙을 정한 아들이 게임기가 눈에 보이자 엄마에게 해도 되는지 물었고, 나는 질문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버렸다.


몇 분 후 상황을 보고서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말았는지 알아차리며 아차 싶었지만 이미 되돌릴 기력도 없었다. 이후 약기운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아이가 갑자기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린다며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아들은 엄마의 휴대폰에 귀를 가까이 대고 상대방의 음성을 흉내 내어 방해가 되었다.


엄마와 달리 정해진 시간 동안 게임을 하고 더 활발히 자극추구형 모드로 진입해 있었기에 펼쳐진 상황이었다. 겨우 통화를 마무리하자마자 분명 기력이 없던 사람은 화가 치솟으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속상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통화 중인 사람에게 그동안 수없이 알려준 기본 매너는 기억나지 않았는지, 평일인데 엄마가 약해진 틈을 타서 규칙을 알고 있음에도 게임을 해도 되는지 왜 물었냐고 서러움에 복받쳐 쏟아냈다. 이러한 체력과 감정상태로는 정상적인 훈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그냥 이 상황을 넘기기도 싫었다.


그래서 반성문을 요구했다. 아들은 이제 취학을 앞둔 예비초등학생이다. 반성문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지만 책이나 영상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린 요구사항이었다. 잠시 후 아이는 스케치북 종이에 꽉 채운 방성문 세 글자를 보여주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다.



어찌해야 할지 1초 정도 고민하고 애써 웃음을 참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피드백을 주었다. 반성문이 무엇인지 모르는 거냐며 본인의 잘못과 앞으로의 대책을 담아서 다시 써오라고 말했다. 아들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두 살 위 누나는 코미디 같은 상황에 이미 혼자 배꼽 잡으며 함박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몇 분 뒤 아이는 다시 새로운 스케치북을 꽉 채운 세 줄짜리 반성문을 들고 나타났다.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 쓴 세줄에 맞춤법이 맞는 단어는 엄마 하나뿐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이미 방성문 세 글자에 나도 아이에게 마음깊이 반성중이었다. 아이를 안아주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 같이 신발을 신고 산책을 갔다.


건강이 최고지만 걸을 수만 있다면 놀이터 벤치의자에 앉아서 쉬는 것이 모두에게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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