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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Nov 23. 2022

일복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일복으로부터 해방 일지


회사에 다니며 느꼈던 어딜 가도 일복(福)이 넘쳐나는 사람의 특징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1. 업무 처리 속도가 빠르다.

2. 책임감이 강하다.

3. 빈틈없이 꼼꼼하려 한다.

4. 답답함을 참지 못한다.

5.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일복이 많은 사람이다. 일이 많든 적든 같은 월급을 받는 직원 입장에선 일복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그런데 이 일복이라는 놈은 갑자기 훅하고 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서서히 소리 소문 없이 슬금슬금 목을 조여 온다. 그러다 일복이 터지는 구간에 도달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호흡이 탁 막혀버린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도 잔업으로 밤 9시, 10시, 12시에 퇴근하는 것은 부지기수. 퇴근해도 업무 전화가 울려대 휴대폰을 부수고 싶은 지경이었다. 주말과 공휴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업무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컴퓨터를 찾아내 일해야 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건지 회사가 내 인생을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회사에 충원 요청도 해보았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하자 분노가 터져 나왔다. 결국 '번아웃'과 함께 '우울증'이 나란히 손을 잡고 사이좋게 찾아왔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정신적 탈진과 무기력감. 아무런 희망이 없는 현실에 절망을 느꼈다. 업무 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왜 살아야 하는 거지.'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동태눈을 뜨고 억지로 꾸역꾸역 회사에 다니고 있는 꼴이 좀비가 따로 없었다. 월급만 바라보고 움직이는 좀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니 남자 친구의 작은 투정에도 크게 화를 냈다. 지금 이 정신상태로는 연애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오랜 연인에게 헤어짐까지 고했다.






얼마 후, 갑작스레 인사 관리부에서 사내 메신저가 왔다. 임원진의 특별지시로 뜬금없이 연봉이 인상되었다는 것. 오로지 나 혼자 인상된 것이니 소문내지 말아 달라며 입단속도 잊지 않았다. 사무실을 오다가다 마주친 월급 좀비의 몰골이 아슬아슬해 보였는지 퇴사를 막기 위해 윗선에서 수를 둔 것이었다.



'회사가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구나!'

'그래, 나 같은 직원을 잃으면 회사가 손해지!'

'나만 특별 연봉 인상이라니, 역시 난 대단해!'



평상시 같았으면 그와 같은 마음으로 기뻐 날뛰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오히려 마음이 차게 식으며 명확하게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돈도 누군가의 인정도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오른 월급을 받아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했지만 역시나 정답은 같았다. 이건 금융 치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 뒤, 같은 팀 선배와 팀장님께 차례로 퇴사 의사를 전했다. 그동안 어떻게 일해왔는지 잘 아는 터라 모두가 퇴사를 말릴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임원진 면담 때 이사님께서는 자신이 그리는 청사진에 내가 없으면 안 된다며 퇴사를 만류하셨다. 당장 휴식이 필요한 나로서는 어떠한 말도 조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리를 비워 둘 테니 3개월만 쉬고 돌아오라고도 하셨다. 내가 없다고 회사가 운영되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있는 동안 일을 열심히 잘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스스로 대견했다.


일을 통해 존재가치를 증명해오던 나란 사람에게 '퇴사'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퇴사와 동시에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잃어버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사일'은 나의 자존심이자 전부였다. 결국 죽기 직전까지 몰리니 '다 필요 없고 일단 내가 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덕분에 회사에서 일복이 터지면 나도 함께 터져버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잊지 말아야 할 사자성어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든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게 (회사) 일복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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