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낮아질 때가 오면

온통 커피색

by 닭갈비

에스프레소 이야기 하나 더.

때는 2010년 상반기. 내가 ‘모카포트’란 걸 구입한 지도 1년이 지나고 있었다. 퇴근 후 기숙사에서 커피를 만들어 먹는다는 사실이 주변에 소문이 나서 동료 중 몇은 저녁을 먹고 내 방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가기도 했다.

당시 수시로 어울렸던 또래 중에 D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멋을 좀 부릴 줄 알았다. 퇴근 후에는 취미로 유화를 그렸고, 옷이나 승용차를 고를 때도 디자인에 대한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그러니 커피를 마시는 취향도 까다로울 수밖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실 일이 생기면 D는 늘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 취향이 얼마나 확고했던지, 다른 친구 하나가 주선한 소개팅 자리에 나가서도 D는 무난한 아메리카노 말고 에스프레소를 시킬 정도였다. 그 소개팅이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난 것이 에스프레소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변에선 두고두고 그 에스프레소를 걸고넘어지면서 놀리곤 했다.


사건이 생긴 날 저녁은 문제의 소개팅 주선자와 D를 포함해 넷이서 먹었다. 먹성이 좋던 시절이라 욕심을 부려 주문을 했고, 다들 배를 두드릴 때까지 음식을 먹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누군가 입가심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차에서 내린 넷은 자연스럽게 내 방에 모여 앉았다.

D는 역시나 에스프레소. 마침 내 방에는 에스프레소잔 한 세트가 있었고 나는 모카포트로 커피를 두 번 뽑아서 아메리카노 세 잔과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만들었다.

저녁 먹는 내내 떠들었는데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우린 잠시도 쉬지 않고 말했다. 커피가 반쯤 남았을 무렵, 나는 ‘절약’을 주제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말하는 흥에 젖어 내가 몸을 써가며 약간의 재롱을 부렸는데, 내 몸짓이 그의 까다로운 취향의 발바닥을 간질였는지 D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기침이 잦던 친구라 웃다가 콜록거릴 때만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D의 기침이 점점 밭아지더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저녁으로 먹은 것들을 게워내기 시작한 것이다.


콜록콜록 어어어어억 아이쿠 거어어어억 아이쿠 그으어어어어억 어머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워낸 음식은 모두 커피색이었다. 사람 위장에 저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끝도 없이 나왔다. 지금 찾아보니 성인의 위장은 보통 1.5리터까지 음식이 들어가지만 많게는 2에서 4리터까지 늘어날 때도 있다고 한다. 가득 찬 생수 한 통을 거꾸로 들었을 때 나오는 양을 생각하면 딱 그 정도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취하지도 체하지도 않은 사람이 속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쏟아내는 장면을 정면에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누구라도 민망했을 것이다. 그것도 남의 방 한가운데 일을 벌였으니 몸을 추스른 뒤에도 D는 어쩔 줄 몰라했다. 휴지와 걸레로 손수 그걸 다 치웠고, 나머지 셋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로 화기애애했던 자리를 급하게 파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는 사건 현장에 없었던 이들도 모였는데, 그들에게 전날 저녁의 대소동을 말하려고 운을 뗄 때마다 D의 낯빛이 커피처럼 어두워져 우리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도 그 자리에 있던 친구 하나와는 아직도 그날 저녁을 떠올리며 킥킥거릴 때가 있다.


살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을 당하면 그때를 떠올린다. TV에 나와 자신의 경험에 과장을 섞어 늘어놓는 희극인들은 많이 봤지만, 남을 토할 때까지 웃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한 때 에스프레소 마니아에게 커피 한 잔 대접할 실력 정도는 됐지. 그리고 그를 웃겨 토하게 만들 입담과 몸짓도 내게는 있었고. D야! 요즘 어디서 뭐 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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