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3시간 남짓 자전거를 탔다. 나는 오래전부터 월요일에 쉬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염원이 있는데, 이유인즉슨 다른 이들의 바쁜 모습에 상대적으로 더 느린 시간을 소유하는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말할 때마다 부덕하게 느껴지긴 해도, 딱히 이걸 미화할 방법이 없는 거 같다.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시원한 보리차를 챙겨갔다. 구름이 껴서 찬 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는 덕에 평소보다 수월했다. 따릉이는 예전에 타던 자전거들보다 무겁고 기어도 3단 밖에 없어서 힘이 몇 배로 드는 기분인데, 컨디션이 좋을 땐 레트로한 감성을 자극하는 기분 좋은 요소이다.
달뜬 기분 탓에 시가에서 올림픽 대로를 넘는 토끼굴(예전 지형 이름인데 현재는 한강 무슨 무슨 터널로 바뀐 거 같다) 앞에서 과속하는 트럭에 놀라서 자전거 페달에 정강이가 찍히고 말았다. 내려오는 걸 보고 서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위협적으로 과속하는 통에 내리다가 헛발을 디뎌서 쇠 페달에 찍힌 것. 잽싸게 보리차와 휴지로 상처 부위를 닦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오늘 파상풍 주사를 맞고 왔다. 어깨가 조금 뻐근하긴 해도 소염제도 처방받았고, 지속 효과가 10년은 간다니 겸사겸사 잘 해치웠지 않았나 싶다. 최근 파상풍약이 수입되지 않아서 백일해와 디프테리아를 같이 예방하는 접종밖에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귀해서 어르신들이 아이를 만나러 가려거든 백일해 주사를 꼭 맞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오늘은 소나기가 내려 늘 만원이던 병원이 한산했고, 의사 선생님과 시답잖은 대화를 잠시 나눴다. 요즘 사람들이 어떻다더라. 스트레스가 어떻다더라. 나도 가능하다면 좀 쉬고 쉽다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는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왔다.
최근 외출을 할 때마다 믿을 수 없이 에티켓이 결여된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데, 추월 금지라는 현수막이 20개는 넘게 걸린 간이 공사 터널에서, 좁다란 안양천 다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추월을 하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행인들을 노려보고 하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뻑뻑 피우며 가는 노인들이나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인디언들은 양심이라는 것이 삼각형으로 생겨서 마음에 꺼리는 일을 하면 삼각형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콕콕 찌른다고 믿었단다. 그게 반복되면 원형에 가까워지고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그들은 아마 다른 사람도 그런다는 말이나 상대가 유별나게 군다는 말들로 비도덕적인 행동들을 합리화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고 양심이 마음을 마구 찔러서 울기도 하고 후회도 하고 상대에게 상처 주었는지 고민하는 삶을 살고 싶다. 효율은 엉망일 테고 손해도 많이 보겠지만, 그게 제대로 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라며 잃어버리는 것은 영감이나 천재성뿐만이 아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와 타성에 젖은 삶, 이른바 어른이 되는 과정에 포함되는 자기 합리화로 만들어진 억척스러움을 성장의 증표라는 듯 여기는 사회적 태도.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우린 더는 순수하지 못하며 기존에 느끼던 설렘을 잃어가는 것이리라.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상처를 받을 테다. 전보다는 경계하고 빠르게 나을 수 있겠으나, 산다는 것은 반드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며, 양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일임이 틀림없다. 거국적인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켜야 할 규칙과 통념을 부정하는 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전복되어서는 안 된다. 구태여 그들과 싸우고 다투고 싶진 않으나, 다수가 과속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아무개가 아무개에게 행해지는 눈 없는 폭력들에 시대니 통념이니 결부시켜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