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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똥구리 Jan 28. 2024

빈 화분

"제라늄이 있던 자리"

  늦은 밤 홀로 숙소에 들어선다. 창가에 덩그러니 빈 화분이 놓여있다. 뚝배기보다 조금 크고 흰 바탕에 옅은 핑크색 체크무늬의 작은 화분이다. 검은흙이 가득하지만 빈 화분이다. 지난겨울 제라늄이 시든 후 주인 없는 황량한 벌판이기 때문이다.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일산으로 이사하고 고무나무, 산세베리아, 스파티필룸, 테이블야자, 꽃기린, 산호수와 같은 화분을 베란다에 가득 들여놓았다. 화초 가꾸는데 정성인 큰누나가 베란다를 가득 채운 화분을 보고는 키우기 쉽고 꽃도 예쁘게 핀다고 작은 제라늄 화분을 선물해 주었다. 취나물 같은 짙은 초록빛 이파리가 무성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제라늄은 기다란 꽃대 끝에 진홍빛 꽃을 피운다. 꽃잎은 약해 아침에 내다보면 화분가에 점점이 붉은 꽃잎이 흩어져 있었다. 꽃대 아래 줄기에서 뻗어 나온 부분을 잡고 살짝 힘을 주면 쉽게 떨어져 나온다. 꽃이 워낙 잘 피어 몇 대를 솎아내어 유리병에 꽃아 거실 책장에 얹어 두곤 했다. 


  몇 해 전 봄, 군산으로 발령이 나고 혼자 내려가게 되어 화분을 돌보기가 어려워졌다. 아내는 화초 돌보는데 취미도 없고 평소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데 화분이 많아지자 개미도 나타나고 날 것들도 날아드니 모두 없애라고 하였다.


  모양 좋은 화분 몇 개는 큰누나 집에 자리를 잡았고 큼직한 화분들은 부모님 집으로 가서 대파, 양파, 고추 심는데 쓰였다. 그리고 이 작은 제라늄 화분 하나만 남았다. 작고 볼품이 없어 남았을 것이다. 버리려다 계속해서 붉고 커다란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대견하여 군산으로 가지고 내려갔다. 


  군산도 처음이지만 직장도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도시였고 식탁 하나 제대로 없는 삭막한 숙소였다. 그래도 다행히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햇볕이 잘 들었다. 그곳에 제라늄 화분을 두었다. 여름에는 물을 주고 겨울에는 비닐을 덮어 온실을 만들어 주었다. 군산에서도 꽃은 계속 피었고 무성해진 가지를 하나 떼어 옆에 꽂아놓으니 뿌리를 내렸다. 꺾꽂이로 또 다른 줄기가 자라나는 게 신기했다. 혼자 지내 별다른 가구도 살림살이도 없는 관사에 화사한 볼거리가 되어 주었다. 


  다음 해 세종시로 옮기게 되었다. 짐을 정리하여 승용차에 실으니 트렁크, 뒷좌석은 물론 옆자리까지 가득 찼다. 책이나 옷처럼 구겨 넣을 수도 없어 제라늄 화분은 그냥 두고 가려했다. 누군가 들어와 살 테니 보살펴 주겠지 싶었다. 짐을 다 정리하고 현관에 서서 방을 죽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년 여간 살았던 집이라 떠나자니 서운하였다. 문득 창가에 덩그러니 남겨진 화분이 보였다. 순간 불쌍한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구나!” 화분을 들고 내려와 좁은 차 한쪽에 실었다.


  제라늄은 세종에서의 첫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세종에서의 생활은 바쁘고 단조로웠다.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았고 아침에는 서둘러 나오곤 하였다. 오피스텔 난방이 충분치 못하였는지 내가 물을 게을리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오 년이 넘었으니 수명대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잃은 제라늄의 줄기와 가지는 점점 마르고 가벼워졌다. 잎이 말라 떨어지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마침내 제라늄이 완전히 생명을 다 했음을 알았다. 고사한 제라늄을 뽑아내고 남은 흙을 정돈해 두었다. 빈 화분을 보면 제라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연 속에 있었으면 비도 맞고 이슬도 머금어 목마르지 않고 시원한 바람맞으며 더위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좁은 오피스텔에 가두어 두고 돌보기를 소홀히 한 책임이 무겁게 느껴졌다.      


  설 지나 봄기운이 느껴져 빈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봄기운과 함께 물을 주면 새로운 생명이 싹트지 않을까 싶었다. 그간 제라늄 꽃이 소담스레 피고 질 때마다 바닥에 겨자씨만 한 꽃씨들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때마다 화분에 다시 담아 주곤 했다. 너른 뜰에 심어 주지 못해 꽃씨를 방바닥에 떨어뜨리는 모습이 애처로워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며칠 후 다시 물을 주려고 다가섰는데 연둣빛 음표가 보였다. 가늘기가 실 같은 줄기 끝에 초록빛의 꽃보다 예쁜 이파리가 달려 있었다. 깨알보다 작은 씨앗에 생명을 품고 흙속에서 봄이 오고 비가 오기만 기다린 모양이다. 반갑고 고마웠다. 


  아직은 쌀쌀하다.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봄이 되면 부모님 텃밭에 옮겨 심을 생각이다. 그곳에서 무심한 주인 없어도 시원한 바람과 촉촉한 비 맞으며 진홍빛 꽃을 피워주기를 소망해 본다. (17.2.28, 2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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