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생 시절, 가장 먹고 싶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이 바나나였다. 흑백 TV로 밀림의 왕자 ‘타잔’을 볼 때면 타잔의 조력자인 원숭이 치타가 바나나를 먹는 장면이 나오곤 했다.
어린 마음에 아프리카는 신기한 동물과 과일이 널려 있는 지상낙원이었다. 봄이면 보리똥과 산딸기를 따 먹으려 동네 뒷산을 헤집고, 칡뿌리 하나 캐려고 곡괭이로 땅을 파던 시절이었으니 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는 그 열대의 나라가 어찌 신기하지 않았겠는가.
타잔을 보고 나면 아이들과 타잔과 악어와 코끼리와 그리고 바나나에 대해 얘기했다. 실제 보지는 못하고 아이들과 이야기만 나누니 갈수록 바나나는 달콤하고 새콤한 천상의 맛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가을 부모님께서 제주도 여행을 가셨다. 그때 제주도는 지금 웬만한 해외 관광지만큼 고급 여행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나나가 나는 곳이었다. 바나나가 제일 중요했다. 나는 바나나를 사다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부모님 돌아오시길 손꼽아 기다렸다. 제주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목포에서 다시 완행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대전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까지 먼 길을 돌아오셨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문득 잠이 들었는데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벌떡 일어나 외쳤다. “바나나!”
과연 바나나가 있었다. 바나나를 까서 한입 먹는 순간, 이럴 수가! 달콤하지도 새콤하기는커녕 느끼한 맛이었다. 게다가 식감도 아삭하지 않고 미끈거리는 느낌이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바나나를 한 개도 다 먹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가을 일 끝내고 동네 사람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신 것이리라. 그때 부모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었다. 아버지는 타잔만큼이나 호기가 넘쳤고 어머니는 제인처럼 젊고 예뻤을 것이다. 그 시절이 그립다. 젊은 엄마아빠가 마음껏 여행하고 맛있는 것 실컷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시절을 다시 돌려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