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석 달 동안 아침글을 쓰지 않았다. 그동안 기술사 공부를 했고 며칠 전 용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다. 기술사는 한두 달 공부해서 딸 수 있는 만만한 자격증이 아니다. 그걸 모르지 않아 이번 겨울을 목표로 느긋하게 공부를 시작했다. 연습 삼아 얼마 남지 않은 여름 시험을 보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에 책을 보니 잊었던 것들이 떠오르고 예전 모르고 넘어갔던 부분도 다시 보니 나름 재미가 있었다.
갑자기 기술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때문이다. 우울증에 빠진 주인공 노라가 죽음의 세계에 들어서서 처음 맞이한 장소가 도서관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서가에는 끝없이 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각각의 책은 각각의 삶이었고 무한대의 책은 무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노라는 자신이 한 번쯤 생각해 봤던 만족할 만한 삶을 발견할 때까지, 북극의 빙하학자부터 시드니 해변에서 파도를 타는 서퍼까지, 여러 생을 살아보게 된다. 결론은 여러 인생을 살아봐도 지금의 삶이 가장 소중한 것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인 것이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흥미로운 스토리로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은가 싶어졌다.
돌아보면 그리 치열한 삶은 아니었다. 한발 물러서 있었고 도전하기보다는 회피하였다. 먼저 덤벼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미루고 기다렸다. 지하철에 승객이 몰리면 다음에 타지 하고 물러서고, 억지로 끼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왜 저렇게 억척스럽게 사나 어쩌면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그들이 대하는 삶이 진실된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새삼 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생각은 지금 내가 내 삶을 열심히 산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까로 이어졌다.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열심히 읽고 메일을 더 정성껏 쓰고 집에서 청소를 더 깨끗이 하는 것일까? 일상을 충실히 사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노라가 시드니에서 파도를 타고 북극에서 북극곰을 마주치듯 일상을 벗어나는 모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아빠로서 아내의 남편으로서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도전이면 족하였다.
아침글을 쓰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도 하나의 모험이었다. 매일 글을 쓰고 매주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직업이 아닌 취미로 글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적이다. 글을 쓰는 것은 천천히 조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경쟁이 없고 실패가 없다. 반면에 시험은 누군가는 실패하고 누군가는 좌절하는 경쟁이다. 기술사 공부는 정해진 기간에 많은 암기를 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실패와 좌절을 맛볼 수도 있다. 굳이 그 스트레스를 자처하고 싶지 않았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실패조차 내 삶의 한 부분임을 알려주었다. 다만 그 실패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실패인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실패였는지가 중요하다. 스스로 열심히 했다면 아쉽기는 하겠지만 후회는 없을 것이다.
막상 공부를 하자니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약속도 줄이고 회식을 해도 과음하지 않아야 했다. 이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리 아쉽지 않았다. 고민은 아침글이었다. 맑은 아침에 글을 쓰는 것은 오랜 습관이고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 같은 일이었다. 이 아침에 글을 쓸 것인가 공부를 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이 고민은 곧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나오는 건 한숨이고 쌓이는 건 걱정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아침글을 포기하였다.
공부를 하며 이미 기술사를 딴 친구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들은 훨씬 이른 시기에 삶의 현실을 깨달은 현자들이다. 젊은 나이에 어쩜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었을까 새삼 대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그들도 손가락이 휘고 팔뚝에 쥐가 나게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을 대단찮게 생각했던 교만이 부끄럽다.
시험 날, 창밖에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혼돈과 경악의 시험은 끝났다. 행운은 없을 듯하여 겨울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지난 석 달처럼 시험공부에 모든 일상을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일상 중에 조금씩 해나갈 생각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허겁지겁 먹으면 그 맛을 모른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면 모든 것은 맛이 있다. 천천히 꼭꼭 씹으며 깊은 맛을 느껴보고 싶다.(24.8.22)
내곡리 호두ⓒphotograph by Soon(23.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