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텔 앞 너른 공터에 호밀밭이 있었다.
호밀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관용이다.
맨땅보다 보기 좋고 먼지도 날리지 않는다.
비극은 이들 호밀은 열매를 맺기도 전에 갈아 엎혀진다는 것이다.
호밀을 거두어 나누어주면 어떨까 싶지만 아마도 경비가 더 들 것이다.
그렇게 호밀은 제 역할을 해보지도 못하고 흙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 밭 가운데에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허수아비의 역할은 참새처럼 곡식을 까먹는 새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갈아 엎어진 호밀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저 허수아비는 무얼 지키지?
지킬 것이 없는 허수아비는 진짜 허수아비구나!"
낙엽이 지고 있다.
올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연초에 느꼈던 열정은 사그라들고 무엇에도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글쓰기도 강의도 뜨뜻미지근하다.
나는 무엇을 지키는 허수아비일까.
(16.11.22, 24.9.23)
사진_합덕친구ⓒsoddongguri(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