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9. 토)
*. 프로미스타(Fromista)-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 (19.5Km 8시 30분 출발- 15시 도착)
<상세 일정 : 프로미스타((Fromista 0.0km) →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Poblacion de Campos 3.5km) → 레뱅가 데 깜뽀스(Revenga de Campos 7.5km) → 비야르멘떼로 데 깜뽀스(Villafmetero de campos 9.5km) → 비얄까사르 데 시르가(Villacazar de Sirga 13.5km)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19.5km)>
전날 바람이 몰아치며 비도 뿌리던 프로미스타(Fromista) 마을은 아침 안개가 자욱합니다. 알베르게에서 나와 마을 사진을 찍고 있는데, 까미노 첫날에 만났던 그림 북을 들고 다니는 미국 청년이 러시아 아가씨와 길동무가 되어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캐나다 할머니와 다니더니 또래 친구를 만났나 봅니다. ‘비포 선라이즈’ 영화가 떠오르며, 이 길 끝까지 시간을 함께 한다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 같은 것 말이죠.
도로와 나란히 이어져 있는 흙길을 걸어갑니다. 안개가 자욱하고 도로에 헤드라이트만 보이는 자동차가 간혹 지나가는 지형으로 이제까지 봐왔던 것과는 다른 풍경입니다. 조금 걷다 보니 포블라시 온 데 캄포스(Poblacion de Campos) 마을이 이내 보입니다. 안개가 살짝 걷히기 시작하면서 주변이 환하게 들어오는데 뱃속에서 신호가 옵니다. 다행히 마을 초입에 알베르게를 겸한 카페가 보여 무작정 들어가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큰일 났다 싶을 때 관리인이 보여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했더니 알베르게 문을 열어 줍니다. 까미노 순례길에서 급한 볼일은 가장 힘든 부분인데 친절한 관리인 덕에 난처한 경우를 면했습니다.
오늘은 출발이 좋습니다. 그렇게 세차게 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었고, 맑은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아주 예쁘게 떠 있습니다. 기분 좋게 발길을 재촉하는데 길 건너에서 캐나다 아주머니가 아주 예쁜 곳이 있다고 가보라 합니다. 초록 풀이 가득한 작은 산 미구엘 성당으로 웬일인지 문까지 열려 있어 기도도 하고 엽서도 한 장 들고 나오며 도네이션도 했습니다.
마을 중심을 지나 우시에사 강의 다리가 나오고 이정표에 까미노 길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잠시 고민을 하다 앞에 가는 프랑스 부부가 넓은 도로 길을 선택하기에 우리도 대세를 따르는 결정을 합니다. 도로 옆 흙길이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던 밀의 새싹도 고개를 들고, 들에 핀 노란 야생화도 햇살을 받아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풀숲 어딘가에서 들리는 개구리울음소리가 평화롭습니다. 평지여서 그런지 마을의 간격이 짧습니다. 걸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음 마을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가 나옵니다.
잠시 카페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마을을 빠져나오니 조금 전과 같이 도로 옆길을 계속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과감하게 넓게 뻗은 대로를 벗어나 밀밭 사잇길로 빠집니다. 전혀 다른 길이 나옵니다. 길 한쪽으로 밀밭이 이어지고, 또 한쪽에는 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강이 흐르는 한국의 논둑길 같은 모양의 흙길이 이어집니다. 조금 전 선택을 포기한 또 다른 길이였던 것이지요... 걷기에 폭신한 흙길과 초록이 피로함을 잊게 하고, 걷다 지치면 풀밭에 앉아 쉬어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비얄까사르 데 시르가(Villacazzar de Sirga)라는 마을로 합쳐지는 교차로가 나옵니다. 템플 기사단이 만들었다는 블랑카 성모 성당에 들러 아픈 동생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해봅니다. 거기서부터 오늘의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약 6.8Km 도로 옆 길을 걸어야 합니다. 도로 옆길이지만 밀밭과 갈아엎은 황금빛 너른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너머 아득히 피레네 연봉의 하얀 눈이 햇빛에 반사되는 경이로운 풍경이 연출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부모님들이 정해 준 대로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고, 남들이 다 가는 직장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안정적이고 미래가 보장되는 삶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다 보면 거센 바람을 맞기도 하고 때로는 진창에 빠지기도 합니다. 길을 잘 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편이 한마디 합니다. 길을 잃거나 돌아가더라도 가는 방향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저 남들이 다 가는 길이라고 쫓아만 갈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해서 가는 결단력과 확신이 있다면 삶에서 길을 잃거나 고난을 만나더라도 헤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 도착하니 크고 작은 성당과 예배당들이 많습니다. 길의 초입에서 다시 만난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귀띔을 해 줍니다. 이곳 스페인에서는 다음 주가 부활절 주간이라 이번 주부터 부활절 축하 행사를 한다고 말입니다. 산타 마리아 델 카미노 성당에서 순례자 카드에 도장도 받고, 성모 마리아의 수태에 관련한 동상과 석고상, 그림 등을 모아서 열린 전시회를 관람합니다. 순례자들의 입장료는 할인을 해주어 3유로입니다. 관람 후 산타마리아 광장에서 볕을 쪼이며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전 타파스를 즐기는 현지인들과 일부 순례자들의 표정을 모른 척 감상합니다. 왠지 정이 가는 마을입니다.
프로미스타의 아침 길은 짙은 안개로 시작한다. 바람 대신에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성마르띤 성당 광장을 지나 다음 마을까지는 걷기가 수월해서 속도를 조금 높여 걷는다. 3.5Km 지점에 오늘의 첫 마을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Poblacion de Campos)가 있다. 마을 초입에 산미겔(San Miguel) 성당에서 잠깐 다리를 쉰다.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Poblacion de Campos)라는 명칭은 ‘밭이 많은 곳’이라는 뜻 같다. 역시 이곳도 중세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의 영지였다 한다. 아내가 기도를 하는 동안 중세라는 유럽 역사의 긴 구간에 교회는 과연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해 본다. 한해(寒害)로 인한 대기근, 흑사병(黑死病)으로 지옥 같은 상황에서 ‘마녀사냥’으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교회가 당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 줄 수 있었을까?
좁은 수로를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진정하며 다소 위안을 받는다. 우시에사 강(Rio Ucieza)이다. 강을 건너 레벵가 데 깜뽀스(Revenga de Campos)로 향한다. 평원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도로의 옆길을 걷는다.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지루해서 지치게 하는 길이다. 오늘 걸어야 하는 전체 거리는 어제에 비해 짧고 바람도 없어 수월한데, 오히려 바람이 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봄 햇살이 강렬하다. ‘우산 파는 아들과 소금 파는 아들을 둔 아비’의 비유를 이야기하며, 여름철 한낮의 더위에도 이 길을 걸었을 순례자들을 생각하며 기운을 낸다.
3월 하순 시작한 이 길이 어느덧 4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이 길에도 봄이 오고 있다. 평원에는 밀밭에서 키가 큰 밀 끝에 이삭이 달리고 유채꽃이 흐드러지고 길가에는 민들레가 한창이다.
깜뽀스(Campos)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 하나를 더 지나 비야르멘테로 데 깜포스(Villarmentero de campos)에서 휴식을 취한다. 식당에 손님도 없고 주인장도 활기가 없는 듯하고 간단히 요기를 하는 우리도 많이 지쳤다. 평지길이고 바람도 없어 속도를 냈던 모양이다. 이제 목적지까지 절반이 남았다.
우리가 걷던 큰길의 북쪽에 조금 돌아가는 사잇길이 보인다, 우리는 그 길로 돌아가기로 한다. 좀 멀더라도 운치를 즐기자는 것이다. 작은 강이 흐르는 시골의 오솔길 같은 이 길에서 오전의 피로를 씻는다.
비얄까사르 데 시르가(Villacazzar de Sirga)라는 마을로 합쳐지는 교차로까지 그렇게 걷다가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이 세웠다는 성모 성당에서 잠시 발길을 쉰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로 가는 길은 다시 큰 도로 옆길을 걸어야 한다. 도로 양 옆으로는 밀밭과 무엇을 심으려는 지 갈아엎은 경작지가 보인다. 이따금 멀리 북쪽으로 보이는 피레네 연봉들이 따가운 햇살에 지친 우리를 위로한다. 자, 힘을 내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 먼저 도착한 프랑스 누님들의 안내로 마리아 델 카미노(Maria del Camin) 성당 등 여러 곳에서 ‘성모 특별전’을 부활절에 즈음하여 열고 있어서 관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동정녀(童貞女) 마리아, 수태고지(受胎告知), 성모(聖母)를 주제로 한 다양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실내가 좀 추워서 광장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야외 레스토랑에서 식전 타파스(tapas)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오늘은 아내가 많이 지쳐 보인다. 저녁은 숙소에서 간단히 해결하며 하루를 정리하기로 한다. 다행히 난방도 잘 되고 고풍스러운 실내와 계단의 벽그림도 제법이다. 휴게 공간도 깨끗하고 실내 채광이 좋다. 오랜만에 깨끗하고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에 목욕 타월까지 비치된 30유로짜리 숙소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의 날이 저물어 간다. 부활절 주간에다 토요일 밤이니 숙소 건너편 바의 안팎이 시끌시끌하다. 아침 업무는 좀 늦게 시작하고, 점심 이후에는 시에스타(siesta)가 있고, 여름철 한 달은 휴무인 나라, 포도주를 나누며 만남과 담소를 즐기는 스페인은 행복지수가 높고 평균수명도 높다.
성당의 시보가 열한 번 울렸는데도 숙소 건너편 바에서 포도주에 얼큰해져 들뜬 목소리들로 소란스럽다. 내일은 오늘보다 7Km 정도 더 걸어야 한다.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3.5km)가 목적지이고, 과거 템플기사단의 근거지여서 생겨난 명칭인 듯하다. 11시 반이 되니 창밖의 소란은 진정되고 이제 나도 몸을 좀 뉘어야겠다. 오늘은 마리아 꿈을 꿀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