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레디고스(Ledigos) (23.5Km 8시 30분 출발- 17시 도착)
< 상세 일정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 0.0km) → 아바디아 데 베네비베레(Abadia de Benevivere 5.0km) → 깔사디아 데 라 꾸레사(Calzadilla de la Cueza 17.5km) → 산따 마리아 데 라스 떼엔다스(Santa Maria de las Tiendas 19.5km) → 레디고스(Ledigos23.5km) >
< by 개미(옥이) >
< 카리온 강 >
까미노 순례길을 계획한 날이 절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길어지고 날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짐을 느낍니다.
오늘은 유난히 힘든 날입니다. 카리오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 마을도 역시 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라 큰 카리온 강의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곧 쾌적한 초록의 공원이 보이고, 그 바로 옆에 역사가 오래된 산 소일로 왕립 수도원(Real Monasterio de san Zoilo)이 보입니다. 현재는 호텔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개장 시간이 아니라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만 찍습니다. 여러 번 개축이 된 듯한데 수도원의 정문은 묵직한 나무 대문으로 낡은 형태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은 그 옛날 순례자들을 위해 늘 열어 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오니 교차로가 보입니다.
< 굳게 닫힌 산 소일로 성당의 정문 >
화살표가 직진 방향으로 되어 있어 따라가니 N-120 도로의 옆길에 마사토가 곱게 깔려 있는 순례길이 시작됩니다. 벌써부터 어깨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이 길의 끝이 어딜지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뜩합니다. 생장 피에드 포르에서 시작할 때의 그 들뜬 마음과 각오는 어디로 갔는지, 왜 이 길을 걷고 있지?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까미노 순례길이 원래의 지루한 일상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 같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마음도 무겁습니다.
당연히 걸음에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남편도 지쳤는지 말을 아낍니다. 그저 묵묵하게 걷고 또 걷고 하다 보니 도로 옆에 쉼터가 나옵니다. 두꺼운 재킷을 벗을 요량으로 내려섰더니 한국의 젊은이 J가 먼저 와 있습니다. 그도 오늘은 배낭이 많이 무겁다는 하소연을 합니다. 까미노 중반에 오는 위기를 같이 겪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다리 쉼을 하고 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만 젊은이 레베카가 지나가며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늘 붙어 다니던 한국의 H는 어디 갔는지, 독일 청년과 함께 길을 걷고 있네요. H는 발에 물집이 잡혀 온타나다에서 쉬고 있다며 며칠 뒤에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넘어온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까미노 순례길 초반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작할 때는 같은 마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안부를 묻고 격려해주고 했는데, 까미노 순례길 중반 400km의 여정을 넘어서고 있으니 이런저런 사정들이 생겼나 봅니다. 하기사 그 많은 날들 중 하루하루가 어디 만만한 날이 있었을까요?
도시가 새로워지며 길을 걷는 얼굴들도 새로워지더니, 부르고스(Brugos) 이후부터는 모르는 얼굴들이 훨씬 많습니다. 구간을 끊어 진행하던 더그 일행과 천사 대모와 소녀도 돌아가고, 영국과 독일 할아버지들은 뒤에 쳐지고, 감기 때문에 하루를 연장한 영국 형제, 또 발목 부상의 한국인 젊은이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보다 앞서 내일 레온(Leon)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볼로냐의 수학도가 있고, 야무진 한국 젊은 여성 둘도 우리를 한 마을 정도 앞서 걷고 있기도 합니다. 어차피 까미노 길은 자신만의 속도로 혼자 가는 길이기에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일상이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래저래 오늘은 마음이 흐립니다.
그렇게 4.5km를 걸으니, 드디어 아스팔트 길과 흙길로 된 로마 길의 교차점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섰으나, 그 길이 줄 고통을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길의 양쪽은 끝도 없는 밀밭 평원입니다. 나무조차도 자라지 못하는 환경인지 어린 나무를 조성하기 위해 심어 놓기는 했으나 나무 그늘이란 찾아볼 수도 없고 민가도, 쉼터도 그 무엇도 없는 황량한 평원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그저 보이는 것은 저 멀리 앞에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뒷모습뿐, 그도 잠시 한 눈을 팔거나 걸음을 늦추기라도 하면 점으로 변하여 시야에서 멀어집니다.
그저 이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넓은 대자연과 우주 안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까미노 순례길을 걸으면서 좋은 것은 그동안 살아가면서 들었던 여러 생각의 조각들을 끄집어내고, 오랫동안 붙들고 사유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게 생각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그렇게 이 길 끝까지 가다 보면 조각조각 나뉘었던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게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로마 길’이라는 이름은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마치 길이 바티칸까지 가야 끝날 기세로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지친다 싶을 때 쉼터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준비해 간 간식을 먹고 있는데, 어제 만났던 베르사유에서 왔다는 프랑스 부부가 걸어오며 가뿐 숨을 몰아 쉽니다. 남편이 쉬었다 가라 권하니 못 이기는 척 합석합니다. 미국 시애틀에서 온 젊은 부부도 붙들어 앉힙니다. 남편은 ‘시애틀의 잠 못 드는 밤’ 영화 이야기, 베르사유 궁전 다녀온 이야기 등을 꺼내며 낯선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합니다. 좀 주착이다 싶어 얼른 일어나자고 채근합니다.
생각해보니 떠나오기 전 사소하게 자주 다투곤 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전혀 다툼이 없습니다. 이 길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맞춰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동지애 때문인 것 같습니다.
< 뒤로 걸어보기 >
쉬고 나서 잠깐 기운이 나는 듯싶었으나 계속 이어지는 로마 길은 지난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며칠 전 재미 삼아했었던 뒤로 가기로 지루함을 덜어 봅니다. 앞만 보고 가다가 뒤로 돌아서니 참 많은 것이 보입니다. 뒤에서 걷고 있는 프랑스 부부가 보이고, 힘들게 걸어온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느새 저렇게 멀리 걸어왔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걸어온 걸 이제야 본 것입니다.
뒤로 걷는 것은 눈으로 확인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길을 믿는 마음의 눈으로 걸어야 합니다.
앞으로 걸었다 뒤로 걸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저 멀리 성당의 종탑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칼사디아 데 라 쿠레사(Calzadilla de la Cueza)마을로 넓은 평원의 오아시스입니다. 모든 순례자들이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첫 번째 카페 안마당에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그들을 피해 옆길로 돌아가니 조그마한 카페가 있어 들어갑니다. 바로 어제 오픈했다는 젊은 부부가 의욕을 가지고 새 사업을 시작하는 카페에서 메뉴 델 디아를 주문합니다. 스페인 현지식처럼 전식-본식-후식으로 나오는 요리는 아주 맛있습니다. 알베르게도 겸하고 있으니 묵고 갔으면 하는 눈치를 주었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또 걷습니다.
그다음 마을 레디고스(Ledigos)까지는 6.5km입니다. 예전 컨디션이었으면 그 정도쯤이야 하고 걸었을 텐데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인지 우리는 또 쳐지기 시작합니다. 생각다 못해 노래를 소리 높여 불러 봅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천천히 부르다, 다시 빠르게 부르다를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레디고스(Ledigos)가 보입니다.
< 저녁의 레디고스 마을 >
사실 우리의 오늘 목표는 레디고스(Ledigos) 다음 마을인데 그냥 주저앉기로 하고 알베르게를 찾아 하루를 쉽니다. 레디고스(Ledigos)에는 아주 세련되고 현대화된 알베르게와 동네 사랑방 같은 오래된 알베르게가 있는데, 우리는 ‘엘 빨로마(El Paloma)’라는 오래된 집을 선택합니다. 시설은 낙후되었으나 푸근한 정이 느껴지는 그런 시골집입니다. 식당을 겸하고 있어 저녁 식사를 주문해 먹는데, 역시 주인아주머니의 손 맛이 기가 막힙니다. 8시가 가까워 오자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원주민과 순례자들이 식당 안팎에서 모두가 이 마을 사람 인양 잘 어우러지며 땅거미가 내립니다. 문밖을 나서니 언덕 끝에 붉은 벽돌의 예쁜 성당이 노을에 비껴 아름답습니다.
< by 베짱이(일이) >
저녁부터 몸이 으슬으슬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긴장해서인지 컨디션이 회복된 듯하다. 어제는 성모 꿈을 꿀 여유 없이 깊이 잔 모양이다. 상쾌한 아침 바람에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카리온 강(Rio de Carrion)가를 걷는다. 현재는 호텔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산 소일로 왕립 수도원(Real Monasterio de san Zoilo)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길 건너편 공원의 초록이 조화를 이루어 싱그럽다.
< 끝없이 뻗어 있는 로마 도로 >
곧이어 N-120 도로 옆길로 넓게 쭈욱 뻗은 마사토 길이 시작된다. 로마 도로(Roman Road) 다. 걷기 좋은 평지 길이어서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도로가 너무 단조로워 지루하다. 지루하면 지치는 법이다. 나는 지루할 때 노래를 부른다. 뒤로 걸어 보기도 하고, 가끔씩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어 먹고 짧은 대화라도 나누는 것들은 길이 주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지루함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이제 까미노 길 중반이다. 피로감이 절정에 달할 때이다. 발바닥과 무릎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와 복통과 미열이 동반되는 감기 증상 등을 호소하는 순례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감기 증상이 오미크론 증상과 비숫해서 은근히 긴장되기도 한다. 아무튼 대개는 극복하고 다시 길을 가는데 일정이 좀 늦어지고 버스나 택시 또는 기차 등을 이용해 좀 큰 마을이나 도시의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 진단을 받고 약을 구하고 그곳에서 하루 이틀 쉬기도 한다.
아내가 아프지 않고 잘 견뎌 내고는 있지만 힘들어하는 표정이 읽혀진다. 내가 수다를 떨고 노래도 부르고 뒤로 걷기도 같이 시도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우리 부부의 산티아고 길을 응원하는 여러 지인들이 일요일은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 아닌 진담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는 너무 쉬지 않고 걸어왔다. 세상 어느 길이라도 아프면 치료하고 힘들면 쉬어 가는 법이다.
황량한 메세타의 지평선 사이로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몸도 마음도 지쳐 간다. 이따금씩 보이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에 위로받으며 힘을 낸다. 혼자만 걷는다면 얼마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길이겠는가? 같이 걷는 이들이 있기에 눈빛과 미소로 서로를 격려한다.
광활한 대지와 지평선 너머의 하늘이 펼치는 시간의 파노라마에 피로를 잠시 잊으며 과거라는 지울 수 없는 시간들을 생각한다. 과거는 나만의 시간일 수 없다. 잊고 싶은 순간의 파편들이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히 떠오르며 현재에 머물러 있다. 탁 트인 공간이 주는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내 짧은 생의 기억은 티끌 같은 것일지라도 유한한 현실의 시간 속에서는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것이다. 회한과 과오의 기록들이 지워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나를 힘들게 한다. 이 고통스러운 고행의 길이 나에게 약간의 위안이 된다 한들 관계의 질곡 속에 깊이 천착되어 있는 고통의 찌꺼기들은 어찌하지 못할 것 같다.
칼사디아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 마을의 작은 카페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고 일어선다. 이 마을은 11세기 초 알폰소 6세가 무슨 전투를 치른 곳이라 하는데 광장에는 누구인 지 모를 동상과 성당이 있다.
산따 마리아 데 라스 띠엔다스(Santa Maria de las Tiendas) 마을을 지난다. ‘띠엔다스(Tiendas)’가 ‘천막’이라는 뜻인데, 아마 천막으로 병원을 겸한 성당이 ‘언젠가’ 있었던 모양이다.
유난히 지치는 날이다. 이직도 목적지에 이르려면 두 시간은 더 가야 할 텐데, 몸도 몸이거니와 마음이 지쳐 가는 것 같다. 무언가 새로운 기대나 희망보다는 그냥 걷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절반인데, 특별한 전기 같은 것도 없을 것 같다.
오늘은 목표로 한 지점 3Km 정도 앞에 있는 레디고스(Ledigos)라는 마을까지만 가기로 한다. 더 이상 가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에서 이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R이 레디고스의 숙소를 소개해주고, 자기는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까지 간단다. 휴가 기간이 빠듯해서 여유가 없는 것이다. 소개받아 찾아 간 알베르게는 오래된 하숙집 같은 인상이다. 조금 전 길에서 만나 방향을 일러 준 아이슬란드 아저씨도 보인다. 아이슬란드 아저씨는 무슨 사연인지 이곳에서 장기 숙박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하니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와 손을 흔들며 웃는다.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표정만 지을 수 있다면 영혼은 늙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프랑스 가이드북을 보고 차분히 20Km씩 걷는 프랑스 누님들을 숙소에서 만났다. 자주 만나니 정이 든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갈수록 영어가 늘고 소통이 잘 되는 것 같다. 한 분은 발에 물집이 잡혀 아프다 하고 또 한 분은 배탈이 났다 하는데 빨리 회복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알베르게 식당은 매우 넓고 마을 사람들까지 있어서 조금 소란하기도 했는데 아내가 글을 쓰는 동안 테이블 위에 누군가가 노란색 에코백과 모자 하나를 놓아둔다. 알고 보니 홍보용으로 무료란다. 그런데 내 것은 주질 않고 아내 것만 두고 간다.
R은 동반자 H가 몸이 아파 온타나스(Ontanas)에 머무는 동안 혼자 걷다가 독일의 라이프니츠 근처에 산다는 청년을 만나 줄곧 함께 걷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제는 따로 걷는 것을 보아 둘이 다툰 모양인 것 같은데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찌 전개될지 궁금하다. 물론 아는 체해서는 안된다. 특히 한국인 젊은이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녀가 소개해 준 이 알베르게는 식당의 음식과 포도주 맛도 일품이고 무엇보다 시설에 비해 난방이 새벽까지 보장되는 방이어서 오랜만에 푸근하게 잠을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