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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May 04. 2023

    규슈올레

<  지쿠호-가와라 코스 >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주 올레를 낳았고, 제주 올레는 현해탄을 건너 규슈 올레를 탄생시켰다. 쉽게 접근하고 따라가기만 하던 산티아고 길과는 달리 규슈 올레는 코스마다 접근하기가 만만하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의 자만심으로 가득 찼던 우리에게 경고하기 위함인 듯도 하다.


하루 걷는 거리가 8.5km~12.5km, 걸리는 시간은 3.5시간~5시간 정도이다. 이 정도면 하루에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후쿠오카의 하카타역 근처 숙소에서 이틀이 지나도록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이 길은 산티아고나 제주처럼 그냥 걷기만 하는 길이 아니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올레 코스에 접근하려면 그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동하려면 복잡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철도와 버스의 노선과 요금 체계 등을 속속들이 이해해야 이동 계획을 짤 수 있는 것이다.


  이틀 동안 후쿠오카 현지 적응하며 연구한 결과 기차를 중심으로, 버스를 보조로 움직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JR 북규슈 레일 패스 5일권을 구매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드디어 규슈 올레 첫 번째 도전에 나선다. 목표는 기타 규슈에 있는 '지쿠호-가와라' 코스이다.


하카타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중간 환승역인 고쿠라(Kokura) 역으로 간다. 그런데 환승하려는데 통과가 안 된다. 쩔쩔매는 우리를 보더니 젊은 여승무원이 나와 이 패스로는 환승 불가고 추가 요금 2,100엔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뿔싸! 우리 티켓으로 모든 기차를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감해하는 우리에게 JR 북규슈 레일 패스로 우리가 가려는 곳을 갈 수 있는 대안을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결국 다시 하카타(博多) 역으로 되돌아와 완행열차를 세 번(하카타역-신이즈카역-다가와 고토지-사이도쇼역)이나 갈아타고, 시작점인 사이도 쇼(採銅所) 역에 도착한다. 사이도 쇼(採銅所) 역은 1915년에 지어졌고, 당시 역사의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어 명성을 얻은 시골 역이다.

< 적막한 사이도쇼 시골역 >


두 량짜리 열차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와 젊은 남성 한 명뿐이다. 역전에 상주하는 역무원도 없는 무인 시스템이다. 문득 <철도원> 영화가 데자뷔 되며 이 역에서도 마지막으로 역을 지켰을 이름 모를 철도원이 궁금해진다. 낡은 듯하지만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의자와 빛바랜 나무 천정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며 그 향수에 먹먹해진다.


작은 시골 마을이 올레의 시작점이다. 신정연휴 막바지인데도 마을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30여 호쯤 되는 마을을 지나는 동안 만난 사람은 인자하게 웃으시던 할아버지 한 분뿐이다. 그렇게 마을을 통과해 바로 뒷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 밖의 깔딱 고개다. 숨을 헐떡거리며 한 십여 분가량 오른 것 같다.

상상외로 키가 크고 촘촘한 대나무숲으로 햇빛도 들지 않는 서늘하고 어두운 길이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뒤따라오는 줄 알았던 남편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는 걸 보니 갈림길에서 엇갈린 모양이다.

역시나…. 기다림에 지칠 때쯤 모습이 보인다. 기다리는 내 표정에 짜증이 묻어 있다며 핀잔을 준다. 세상에…. 자주 반복되는 일상이다.

“아! 오늘도 힘들겠구나….”

서로 말을 아끼면서 각자의 속도로 길을 간다.   

  

산의 중턱쯤 올라오니 편백나무 숲으로 바뀌며 하늘이 보이질 않는다. 워낙 나무들이 촘촘하게 심어진 까닭이다. 키를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진 나무들이 여기저기 가로질러 놓여 있다. 마치 원시림을 걷고 있는 듯하다. 인적도 없다.  오랜만에 도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연 속으로 들어오니 온몸의 오감이 열린다.

가슴으로 숲과 호흡하고, 눈으로 초록의 나무들과 인사하고,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위의 새소리를 듣는다. 물론 숨이 턱에 차올라 뱉어내는 나의 날숨소리도 들린다.


이렇게 걸을 때면 평소의 모든 활동과 일상의 일들에서 벗어나고, 체면상 필요한 일이나 남들에게 신경을 쓰는 일 따위는 물론 하던 일마저도 손에서 놓아 버리게 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더 이상 그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    

 

그렇게 30분여를 치고 오르니 숲의 끝 지점이 보이고 눈 부신 햇살이 아주 조금 나무의 끝자락에서 비쳐온다.

산을 오를 때 정상이 가까워져 오면 더욱 숨이 가쁘고 힘이 든다. 이 순간에는 위를 쳐다보지 않고 땅만 보고 걷는다. 내가 올라갈 곳을 미리 가늠하기 시작하는 순간 발걸음이 더 더뎌지고 땀은 더욱 비 오듯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 힘듦을 줄이기 위해 정상을 머릿속에 그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오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해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산이 주는 교훈이다.    

  

둥그스런 원형의 정상(야야마 언덕)에는 청색의 올레 표시가 있고 조그만 쇠로 만든 종이 나무에 걸려 있다. 산 너머로 사이도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건너편 가와라 산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 야야마 언덕의 쇠종과 올레 표시 >

내려가는 방향의 올레 표시가 잘 보이질 않는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어야 한다. 지나치게 친절할 정도로 안내판이 잘되어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비해 여기는 그저 날 것 그대로이다. 아니면 조성해 놓고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니 관리가 잘 안 된 듯도 하다. 그저 안내하는 것은 드문드문 나무에 매달려 있는 빨강‧파랑의 리본뿐이다.


너른 들녘과 공업단지를 지나고 한적한 마을을 지난다. 제법 많이 걸었다.

서울은 영하권으로 한파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는데, 이곳의 밭에는 아직 뽑지 않은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알맞은 기온과 따뜻한 햇볕이 내리비치는 언덕에서 시장기를 달랜다. 그저 빵 한 조각과 커피뿐인데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의 여유는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마법과도 같다.


길과 마을에 인적이 드문 것이 이 길의 특징이다. 한가하다 못해 나른해 보인다. 그럼에도 한편에선 꼼꼼하고 치밀하기로 이름난 일본식의 세심한 개발이 이 시골 마을에서도 분주히 진행되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니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신정 연휴를 보낸 귀경길 차량들이 줄을 지어 분주히 오고 간다. 고속도로 옆길을 지나 바로 휴게소가 나오는데, 차들이 즐비하다. 식당에는 식사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는 간식을 먹은 터라 그냥 지나쳐 왼편의 가미마부 공원으로 오른다. 공원의 뒷산을 넘어가니 저 멀리 이 올레의 종착지 가와라 마을이 보인다. 조용하고 아담했던 사이도쇼 마을에 비해 가와라 마을은 제법 큰 소도시다. 마을 뒤편 산에서 구리를 채굴하여 산 위 공장에서 가공되어  마을 아래 공장으로 보내지는 모양이다. 그 이동하는 통로가 우뚝 솟은 빨간색 철교 위로 주욱 뻗어 있다.   

   

 가와라 역에서 마을 길을 따라 뒷동산을 오른다. 양수리 수종사의 은행나무보다 더 오래되었을 녹나무가 산 아랫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그 바로 옆의 암자는 황폐하다 못해 돌부처 상들이 깨지고 부러지고 나둥그러져 있다.  이곳이 올레길이라고 하기에는 버려진 동네 뒷동산 후미진 길처럼 보여 걷는 내내 불편함이 느껴진다.      

거의 외길을 걸어 나오니 가와라 신사가 보인다. 신년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기도하고,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 신사에는 상왕석이라는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고, 고대 신라 국가의 신을 모셨다는 비가 입구 쪽에 세워져 있다. 첫 번째 올레 코스에서 우리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한 것 같아 뿌듯하다.     


이제는 가와라 역으로 다시 돌아가 기차를 타고 하카타(博多) 역으로 가야 한다. 정초라 시골 마을은 모든 식당이 휴업이다. 먹는 것을 포기하고 JR 히타히코산 선에 몸을 싣는다.     

 

시작이 막막했기에 포기하고도 싶었던 규슈 올레이다. 처음으로 한 코스를 하고 보니 내 몸이 다시 살아남을 느끼며 걷기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 그래! 시작이 반이지, 첫술에 배부르겠어? 잊지 말자…. 산티아고를 걸을 때도 그랬잖아….”   

  

여행은 늘 설렘과 긴장이 공존한다. 강제된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쾌감이 여행의 본질이다. 그렇게 시작할 때는 두려운 마음으로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나, 그 새로움도 어느새 편안하고 다시 익숙해진다. 공간을 이동하는 흥분과 즐거움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다. 상상의 세계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짐을 싸고 길 위로 나선다.


< By 베짱이 일이 >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니 새벽 3시 34분이다. 살짝 불을 켜니 아내가 뒤척이길래 화장실로 자리를 옮긴다. 오늘부터는 조금만 더 긴장하자. 그리고 겸손하게 길을 대하자. 산티아고에서의 초심을 상기하자. 길은 늘 굴곡지고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렵게 보이다가도 순간 해결되기도 하는 것이 길의 경로이며 인생행로이기도 하다.   

   

 나이 60이 넘었건만 아직도 황혼 녘이 아닌가 보다. 날개를 펴질 못하는 부엉이가 되는 나를 본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자책하거나 자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위안하고 다독인다.

 내상이든 외상이든, 연유야 어찌 되었든 결핍과 좌절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것도 온전히 내 몫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은퇴를 핑계 삼아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따뜻하게 위로받을 수  있었던 시간이 일 년이 되어 온다. 지난해 산티아고 걷기를 정점으로 자아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다. 과거의 짐을 내려놓으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걸어가는 모양새도 사뭇 달라졌다.


 밤사이 고심하여 아내가 제시한 변경안을 신속히 수용한다. 오늘 목적지는 유후인이 아니라 기타큐슈(北九州)의 치쿠호-가와라(筑豊-香春) 코스다. 우리 부부의 역사적인 첫 규슈 올레이다.

첫새벽에 짐을 챙겨 잰걸음으로 하카타역에 도착한다. 6시 6분 신칸센 열차를 탄다. 그러나 경유지 고쿠라(小倉)에서 복병이 나타난다. 우리가 산 JR 패스로는 이 구간을 이용할 수 없다. 목적지 사이도쇼(採銅所)역까지 가려면 이천 백 엔(2,100円)을 더 내고 새로 표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다 역무원이 알려 준 대로 하카타역으로 되돌아가서 JR 지선(支線)을 이용하기로 한다. 두 번을 더 갈아타야 하므로 번거롭기는 하지만 교통비도 절약되고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기에 그 방법을 택한다.  

   

펼쳐진 철로 변의 전원 풍경이 봄기운을 가득 담고 풍요로워 보인다. 잠시 내가 사는 시골 마을의 모습도 떠올려 보며 상념에 잠긴다.    

 

열차가 사이도쇼(採銅所)역에 정차한다. ‘구리 채굴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구리광산과 석회암 광산으로 한때 유명했으나, 현재는 채굴량이 현저히 줄어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이다. 번성했던 과거 모습은 역사 내부에 걸린 사진과 영화·포스터 등으로 짐작해 본다.      

< 사이도쇼 역 구내의 모습 >


너무 감상에 젖었던 탓인지 시작부터 길을 잃는다. 마을 입구 언덕 위의 납골 묘에 이끌려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아 버린 것이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시작하며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간다.

< 지쿠호-가와라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올레... 제주올레와 같은 간세 >

 짐짓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철길 양쪽에 번갈아 시선을 던져본다. 아내가 멀리 언덕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너무 멀어 표정은 잘 보이질 않는다.


  첫 번째 산길은 초입부터 매우 가파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가 큰 대나무와 삼나무 군락이 우거진 숲길이다. 생경한 풍경이다. 숨을 고르며 호흡을 가다듬어 보지만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온대 몬순과 아열대 몬순의 중간쯤 되는 기후라 온화하고 비도 많이 내려는 지역이다. 숲이 무성하고 나무들도 무척 크다. 서늘하고 습한 대기를 호흡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부(鞍部)에 오른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내려 등을 흠씬 적셨건만, 향기롭고 신선한 숲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씻어주어 정신을 맑게 한다.    

  

올라온 길만큼 내리막길은 경사도 가파르고 길게 이어진다. 어둡고 습한 기운에 두텁게 쌓인 젖은 낙엽으로 길이 미끄럽다. 주변에 쓸만한 대나무 지팡이라도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으나 구하지 못하고 조심조심 장딴지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긴다.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야 대나무 두 개를 주워 아내와 나누어 쓰고, 길 끝에 마련된 지팡이 통에 넣어 둔다.


 숲길의 끝은 잘 포장된 도로와 탁 트인 들녘으로 이어진다. 평온하고 조용한 전원 마을이 조화롭게 펼쳐진다. 주목이 담처럼 빽빽이 둘러싸여 있고, 동백과 이름 모를 꽃나무들로 연출된 정원의  집들이 단아하다. 사람 대신 주인 행세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게으른 걸음을 옮길 뿐, 골목길 끝까지 개 한 마리도 마주치질 않는 묘한 적막감이 흐른다. 마을 끝에 위치한 언덕 위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걸어온 도로와 집들과 골목길 그리고 처음 넘은 산자락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언덕을 내려서자 또 숲길로 이어진다. 은은하게 퍼져 드는 햇살에 그윽한 숲의 향기가 새소리와 바람에 섞인다. 댓닢의 살랑대는 소리가 숲의 내밀한 고요를 가볍게 깨운다. 짙은 숲그늘에 드리운 그윽한 신비감이 ‘원령공주’의 한 장면 같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큰 나무 위의 새 울음소리는 한층 더 신비로움을 고조시킨다.     

 일본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과 함께 사는데 익숙하다. 죽음은 삶과 이어진 시간이며 공간이다.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은 일상의 부분이다. 죽으면 누구나 신이 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죽음을 삶의 곁에 두고 살아간다. 마을 곳곳에 크고 작은 가족묘와 사당들이 있고, 집안에도 조상의 신주와 신들을 모시는 공간들이 있다. 사오백만의 신들이 사는 나라답다. 숲에도 수많은 정령들이 살고 있다.


규슈의 가옥들은 이층으로 기와를 올려 전통을 유지하되 그 위에 다양하게 덧대거나 개량한 형태이다. 그래서 일본의 마을과 도시를 걸으면 과거의 시간 속을 여행하는 듯한 묘한 매력에 빠지게 된다. 일본 식민 지배의 흔적이 남아 있던 한국의 1950~60년대 도심지에는 왜식 전통 가옥이나 양옥으로 개량된 왜식 가옥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어린 시절의 골목길 추억이 되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걷다 보니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경사도가 심한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얼마나 올랐을까? 몸이 달아오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어느덧 숲과 하늘의 경계다. 구릉의 정상부인 야야마(失山) 언덕이다. 나무에 설치된 쇠종을 치며 첫 번째 올레길의 안전과 행운을 빈다. 건너편의 우뚝 솟은 산이 가와라(香春)산이다. 저 산을 넘어야 오늘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내려가는 길 역시 가파르고 낙엽과 돌이 많아 바짝 긴장해서 걸어야 한다. 거기에 인적이 드물고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인지 길마저 훼손되어 걷을 수 있는 길을 찾느라 금방 피로가 몰려온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넓은 도로에 창고와 공장 건물 등이 들어선 산업 단지를 지난다. 마을을 둘러싸고 흐르는 큰 하천길을 따라가니 곳곳에 수확하지 않은 배추와 무밭이 널려 있다. 한 겨울에 싱싱하고 파릇한 채소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1월의 기온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따가운 햇살이 골짜기의 한적한 마을에 가득하다. 따뜻한 들녘에 풀 섶을 방석 삼아 쉬어간다. 낯선 공간에서 나란히 앉아 나누어 마시는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의 행복에 감사하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고요히 응시한다. 섬뜩할 정도로 한적한 마을의 고요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바쁜 일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


 휴식 후 속도를 내어 걷다 보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자동차 행렬과 소음으로 일순 정신이 번쩍 든다. 신비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자동차 도로의 신호를 기다려 길 건너 휴게소로 들어선다. 휴게소에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휴게소 뒤편의 언덕길에 가미마부(神間步) 공원의 표지판이 보인다.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여 공원을 오른다. 예상보다 싱겁게 오른 오르막길에서 오늘의 종착지인 가와라(香春) 마을을 내려다본다. 가와라 산에서 석회암을 채굴하여 마을 아래 시멘트 공장으로 운반하는 빨간색 컨베이어 벨트가  도드라져 보인다.      

가와라 마을은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분주한 소도시다. 적막하다 할 정도로 고요했던 사이도쇼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마을 길도 잘 포장이 되어 있고, 안내 표시도 잘 되어 있어 걷기에 편하다. 파란색 올레의 간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여유롭게 걷는다. 마을 뒷동산으로 오르며 맞닥뜨린 거대한 녹나무가 고찰 모토코간지(元光願寺) 입구에서 수호신처럼 아랫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단풍이 아름다운 정원이라는데 겨울의 모토코간지는 쓸쓸하고 쇠락한 모습이다.   

< 마을을 굽어 보고 있는 녹나무 >

   

 겨울철 인적이 없는 산길은 호젓하다 못해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잰걸음으로 얼마를 걸었을까? 정원이 잘 가꾸어지고 건물이 웅장한 가와라 신사(香春神社) 가 나타난다.  이 신사는 8세기에 세워졌고, 신라국의 신인 가나다신(伽那陀神)이 봉안된 곳이다. 경내에는 상왕석(上王石)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31편의 무라(武良)가 적혀 있다. 무라는 일본의 고대 시가이다. 상왕석은 전쟁 중 파괴되었고 복원 기금으로 재현하여 도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바위는 복제물이다.

< 신라국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비 >

고대 신라와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 면면히 흐를 문화 교류의 유전자가 내 안에서 꿈틀거림을 감지하며 가와라 역으로 향한다.     


규슈 올레의 첫 번째 여정은 작년 산티아고의 34일을 기억해 내는 시간이었고 시작이 지난했기에 더 벅찬 마무리의 감동이 있다. 오늘의 감동과 자신감이 올레길 내내 우리를 또 다른 감동으로 이끌 것임을 확신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언제나 공감이 되는 명언이다.


하카타(博多) 역 가는 길이 집으로 가는 길처럼 마음에 평온을 준다. 11.5km는 산티아고 하루 일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거리지만 난이도가 제법 있는 초행의 산길이어서 몸에 피로가 쌓였다. 역 주변 식당들은 신정 연휴 탓인지 연 곳이 없다. 먹는 것을 포기하고 JR 히타히코산 선((常陸小田山線) 열차에 무거운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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