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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Dec 09. 2022

돌발 상황을 대하는 자세


10월 달엔 파리에 사흘간 있다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는 오후 7시 10분 정도에 출발이었는데, 6시 10분 정도쯤에 우버를 부르려고 보니 도착 시간이 오후 7시 15분으로 찍히는 게 아닌가? 파리 저녁 퇴근 시간 교통 체증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서울 사람의 마인드를 잊고 툴루즈에서 2년 가까이 살다 보니 거리와 시간 계산에 착오가 생겼던 것이다. (툴루즈는 시내에 산다면 어디에 살든 대략 30분이면 기차역에 갈 수 있다.)


비싼 표를 버렸다고, 망했다고 지금은 가능하니 내일로 표 바꾸자고 하는 또마를 두고 나는 그럼 지하철을 타고 가자고 했다. 남자 친구는 '지하철을 타는 게 어떻게 시간이 덜 걸리냐'길래 '지금 저녁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 그런 거고, 보통 대도시에선 이 경우 지하철이 있다면 그게 제일 빠르다'라고 대답해 줬다.


그렇게 우리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기 시작했다. 우리의 여행 짐, 출발 당일에 한인 슈퍼마켓에서 산 순대와 김치와 함께... 왠지 반신반의하는 또마를 안심시키고 일단 방향에 맞게 지하철을 타서 구글 맵으로 경로를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 친구 누나 집은 뷰는 좋을지 몰라도 몽파르나스 역으로 가기엔 경로가 간단하지 않았다. 맵에 따르면 대략 기차 출발 15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지만 두 번 환승을 해야 해서 경로가 꽤 복잡했다. 환승 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파리엔 샤틀레(Châtelet)라는 1, 4, 7, 11, 14호선이 만나는 대표적 환승역이 있는데, 환승하는 호선에 따라 아주 잘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자세히 보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라는 표시가 있었고, 그렇게 다른 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는 경로였다. 어렴풋이 수년 전에 샤틀레 역에서 그렇게 좀 헤매다 환승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샤틀레 역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


우버 택시의 도착 시간을 본 순간 멘붕도 잠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로를 검색하고 시간 내 세이프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평정심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렇게 대도시 중 대도시인 서울 사람으로서 그간 다져진 스킬과 그간 파리에서 지하철 환승한 경험을 바탕으로 또마와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출발 7분 전 기차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툴루즈에 도착하고도 지하철이 갑자기 중단되어 다니지 않는 데다 택시도 잡히지 않아 걸어서 트램 정거장까지 걸어갔고, 집에 오니 잠시 정전까지 되어서 쉽지 않은 하루였다.


또마는 그날 저녁나절에 일어난 일에 분개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카르마(karma)냐며 화를 내길래 그래도 기차를 탄 것이 어디냐고 다혈질인 그를 다독였다. 스스로 그렇게 하면서도 놀란 것이 예전만큼 쉽게 화가 나지도 돌발 상황에 마주할 때 예전만큼 패닉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도 20대 내내 꽤 다혈질적 성격이었다. 나를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들 중 몇 명은 20대까지의 내가 화가 잘 나고, 불만이 많고, 약간 모가 난 마음을 가진 무서운 친구였다고 했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30대가 되고 그 후로도 시간이 가면서 지금의 성격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물론 아주 큰 일에는 여전히 크게 당황하지만, 이번과 같은 종류의 사건은 대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과 당황을 해봤자 해결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혈질의 늪에서 벗어났지만 우스운 점은 남자 친구는 굉장히 다혈질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또마는 평소엔 꽤 느긋한 성격인데 어떤 특정한 포인트에 꽂히는 경우 0.1초 만에 화르륵 화가 도졌다가 내려가는 스타일이다. 화가 나는 것도 빠르지만 가라앉는 것도 빠르다. 또 가끔 돌발 상황을 맞닥뜨리면 굉장히 멘붕 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아빠 같은 다혈질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지 되뇌고 그렇지 않은 남자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놓고, 정작 같이 살게 된 남자는 아빠만큼 다혈질이라니. 인생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또마를 달랠 능력이 지금의 나에게 있으니 사태가 대개 빨리 진정되고, 그를 보며 나는 평정심을 도리어 유지하려고 하고 그는 거꾸로 내가 조용한 것을 보고 평정심을 되찾으려 한다는 점을 위로로 삼을 순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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