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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Feb 15. 2023

계급의 세계

나의 자리는 그 사이 어딘가

나는 엄밀히 말해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따진다면 결혼 이민 계열로 프랑스에 왔다. 멋들어지게 전공을 살려 학생 비자로 왔다면 결혼 이민 계열에서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시민교육(Formation civique)은 의무가 아니었을 테지만, 프랑스에서 고등 교육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이 가족 비자 계열을 장기로 받으려면 이 교육은 의무 사항이다.


시민교육을 하러 오라는 연락이 또 한 세월 걸린 것 같아서 내가 자발적으로 무려 '우편으로' 신청했는데 그럼에도 신청부터 수강까지 장장 3개월이 넘게 걸렸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행정.


아무튼 그렇게 나의 예상보다 늦은 작년 12월에 시민교육을 들었다. 남자 친구의 예상대로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고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프랑스어를 잘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배치한 모양이라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통역관이 오는 반에 배치되었다. 대략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중 프랑스어를 주언어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은 5명 남짓이었다.


우리 반에 온 사람들은 사는 동네가 신기하게도 꽤 비슷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아랍계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 외곽 지역이라고 한다.


첫날 프랑스어를 좀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히는 바람에 내 옆에 앉은 아프리카 여성 M은 인적사항을 적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알고 보니 그녀는 프랑스어를 말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문맹에 가까웠다. (난 태어나서 문맹을 처음 만나보았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도와주며 대화를 텄고, 그녀는 나와 동갑으로 기니 출신으로 세 명이 딸이 있는데 여성 할례(위키피디아)를 피해 프랑스로 난민으로 왔다고 한다.


이 순간 내가 대학생 때 수강했던 국제정치학 수업에서 여성 할례 문제를 발표 주제로 삼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15년 가까이 된 일이지만 여전히 기억날 정도로 충격적인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도 홀몸으로 프랑스에 온 것 같았고, 4년째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나라의 보조를 받으며 살아가는 듯했다.


M도 그렇지만 거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이 없거나 저소득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고, 나는 들어본 적이나 있지 잘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 정부임대주택(HLM)이라거나 주택보조금 정책에 대해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교육은 주 1회씩 4회에 걸쳐 진행되는데 두 번째 교육부터는 코트디부아르(프랑스어권 국가) 출신의 C라는 여성도 우리와 함께 앉게 되었다. 그녀는 다소 톡 쏘는 말투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직업이나 학력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다소 자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때마다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곤 했다.


어쨌든 나와 M 그리고 C는 3차 교육일에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 어차피 4차 교육은 선택 사항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듣게 되는 것이고 나는 그 마저도 날짜가 맞지 않아 조정을 따로 요청했기 때문에 이들 중 아무도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낯선 사람과의 식사를 꺼리는 나도 그냥 그녀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녀는 리들(Lidl)이란 마트 체인점의 캐셔로 일하고 있다고 했고, 그 일을 구하느라 꽤 힘들었다고 말했다. 리들은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상품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 체인이다.


그녀들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꺼내 각자 나라의 식문화인지 손으로 뜯어서 먹었고, 나는 내가 싸 온 김밥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녀들은 내가 아프리카를 정말 모르듯, 아시아에 대해 그리고 한국에 대해 너무도 아는 것이 없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니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특히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모르는 지경이라 북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었다. 마치 10여 년 전 교환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도 그녀들의 국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이것저것 물으며 코트디부아르는 독재 정부를 겪었으며, 기니에는 엄청나게 많은 부족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니든 코트디부아르든 성을 보면 대략 어느 부족(그들은 origine이라고 표현한 듯하다)에 속하는 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오늘 쓰려는 얘기는 어떤 사람에겐 불편할 수도, 어떤 사람에겐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현재의 주변 친구들은 몇몇의 고등학교 친구들을 제외한다면 대개 중산층이며, 내 남자 친구 역시 프랑스의 중산층 출신이다. 반면 나는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니면서 출신 계급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는, 교육으로 계급을 세탁한 전형적 케이스이다. 내 부모님은 대학 문턱 조차 밟아본 적이 없고 정부 임대 주택에 살고 있으며, 은퇴할 나이가 다 된 엄마는 여전히 생활비 마련을 위해 고된 육체노동을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느끼게 된 괴리감은 나를 항상 괴롭혔다. 전공 때문인지 계급에 대해 배우는 게 늘어가다 보니 고통은 끊임없이 가중되었다.


나의 출신 성분인 서민 계급(classe populaire) 특유의 행동 양식, 문화 등을 혐오하게 되면서 나에게 뿌리내린 계급의 흔적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수십 년 각고의 노력을 걸치니 어떤 부분은 정말로 나에게 녹아들어 체화가 되었고 그렇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중산층의 때깔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눈으로 나는 시민교육에 참여한 그 사람들을 마주했다.


M과 C와 식사를 하며, 그녀들은 나의 어머니가 주로 가졌던 직업들을 나열하며, 이런 직업을 프랑스에서 참 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의 출신 계급을 오랜만에 다시 마주했고,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그녀들과 엄청난 대화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나의 원천을 마주했으며 순간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내가 떠나온 곳이 그립고 어울리고 싶으면서도, 이미 나는 그곳에서 너무 많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서글프기도 하고 조금은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과 이런저런 생각을 머리에 짊어진 채로 나는 그녀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M과는 이미 연락처를 교환했고, C는 나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갔다. 하지만 그녀들도 나도 서로 연락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이 회색존에 계속 머무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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