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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은 Jul 11. 2022

인연의 양

 사람들은 저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관계를 맺고 산다. 친구, 연인, 가족, 직장 동료, 넓게는 지인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중에는 어쩌다 인연이 닿아 손쉽게 이어진 관계도 있고, 끊고 싶어 미치겠지만 차마 끊지 못하는 관계들도 있다. 반대로 닿고 싶어 온갖 애를 써도 약 올리듯 절대로 닿지 못하는 관계 아닌 관계도 있다.


 어디선가 '인연의 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맺는 수백수천 개의 관계에는 저마다 정해진 인연의 양이 있다고 누군가 그랬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정, 우애, 신의, 증오, 불신 등의 이름으로, 어쩔 때는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인 모양새로. 이 인연의 양이 무한대인 관계에서는 관계의 끝이 없을 테고, 인연의 양이 애석하게도 모래 한 줌 정도인 경우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갈 테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믿지 못할 만큼 우연스레 나타나는 사람 사이의 일들이 참 많다. 이름을 겨우 기억하고 있던 유치원을 같이 다닌 친구는 어쩌다 고등학교 때 보낸 짧은 페이스북 메시지 한 통으로 인연이 한동안 이어졌고, 중학교 때 잠시나마 사랑했던 나의 첫 남자 친구는 몇 년 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대학교 2학년 아주 날씨가 화창했던 봄날 금요일에 '토요일인데 뭐해'라는 어이없는 메시지로 다시 내 인간 관계망에 발을 담갔다 떠났다. 이렇게 맥락 없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인연들에 대해선, 아직 우리의 관계에 인연의 양이 조금은 남았었구나-,하고 생각하면 퍼즐이 맞춰진다. 납득이 간다.


 그렇게 두 손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인연의 양이 적을 때에는 그 양을 모두 소진해버리고는 '아, 벌써 다 써버렸구나.'하고 손을 탈탈 털어버리면 아주 깔끔한 이별이 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항상 그렇게 이성적이고 깔끔하지는 못해서 인연의 양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서 손에 힘을 꽉 주고는 없어져가는 인연의 양을 쥐어 틀어잡으려 하는 관계의 끝맺음도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인연의 양이나 모래나 하여간 얄궂게도 꽉 쥐면 쥘수록 더 빨리 없어지는 법이다. 그럼 속수무책으로 사라진 인연의 양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과거를 회상하게 될 게다. '아닌데, 분명 있었는데. 많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킬 수 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하며 과거에 머물며 자신을 책망하게 될 수도 있다.


 끊고 싶어 미치겠음에도, 끊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정'이라는 이름 아래 차마 놓지 못하는 관계들도 있다. 곁에 있을 때 나의 변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나에게서 나다움을 앗아가는 사람. 머리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인연의 양을 쿨하게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그 주변을 빙빙 맴도는 자신을 생각하면 그만큼 자괴감이 드는 순간은 없다. 이까짓 거 눈 딱 감고 끝내면 그만인데. 그게 나에게 이득일 텐데.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만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눈먼 관계에 들어서면 천하장사도 별 수가 있으려나.


 한심하고 의지박약인 운명론자의 합리화로 들릴 수도 있겠다만, 타고난 인연의 양을 나는 믿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예전에 두 손 탈탈 털고 깔끔한 마음이어야 마땅한 그런 관계가 나의 마음에 계속 머물고 있음에 자책하지 말고, 또 이성적으로는 이미 끝내야 했을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나의 미련함에 한심해하지 않길 바라면서. 내가 나빠서, 미련해서, 모자라서, 못돼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의 인연의 양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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